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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30. 2019

약해빠진 고양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는 사람들 16화


공동 주택 안에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 청소기를 돌리거나 원두를 갈 수 있는 시간은 오전 열 한시부터 새벽 한 시 정도야. 세탁실은 24시간 열려있어서 어느 때고 사용할 수 있어. 창문 너머로 마주 보이는 곳은 산을 깎은 비탈. 그 아래엔 칼로 잘 자른 듯 반듯한 텃밭들이 열을 맞춰 싹을 틔워. 먹을 수 있는 채소들도 잔뜩이지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지. 칸칸마다 주인이 있는 듯한데, 나는 칸테 하나만으로도 버거워서 그냥 눈요기만 하는 중이야. 스티로폼 박스 속 커피 찌꺼기 역시 오래 발효시켜 공동 거름으로 사용하는 듯해. (나도 커피 찌꺼기는 잘 말려서 그곳에 버리고 있어.)


두 채의 공동 주택에는 약 서른 명 안팎의 사람들이 살아. 반상회는커녕 흔해 빠진 공지문 하나 붙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의 룰이라는 게 있어서 모두가 그 분위기에 맞춰 물처럼 생활해. 매끄럽게 일사불란하달까.


나는 요즘 자전거를 타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달려. 나란히 서 있는 주택을 따라 가면 커다란 공터가 나오고, 길도 닦이지 않은 구불구불한 길을 가로질러 가면 다 쓰러져 가는 부동산 하나와 백반집, 그리고 여전히 임대를 기다리는 작은 공간도 있어. 집 근처에 있는 편의시설이라곤 이게 전부야. 그도 그럴 것이 이 근방 주민이라곤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서른 명 안팎의 사람들이 전부거든. 마트나 카페에 가려면 개천을 건너 큰길까지 나가야 해. 도보로는 꽤나 먼 거리지만 자전거로는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하니까 바람도 쐴 겸 기분 좋게 다녀올 수 있어. 


사실 자전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어. 아빠와 헤이즐넛 아줌마가 핸들에 거대한 리본까지 묶어서 가져왔더라고. 좋아하는 티를 숨겨보려고 입꼬리에 잔뜩 힘을 줘도 들뜬 마음이 감춰지질 않았어. 전부 눈치채 버렸을 게 분명해. 완전히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을 테지. 그래도 감동할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던 건 사실이야. 새집에 처음 와보는 사람들이 운명처럼 꼭 맞는 선물을 사 왔을 리는 없고, 아마도 주도자는 진진일 거라 예상하고 있어. ‘제인에게 뭐라도 해 주실 거라면, 자전거로 부탁드려요. 바퀴 달린 거라면 뭐라도 필요할 테니까요’ 진진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늘 그랬듯. 당당한 보호자의 말투로.


며칠은 갖가지 이유로 바닥을 굴렀어. 길고양이를 피하려다가, 푹 파인 블록을 미처 보지 못해서, ‘좋은 아침’ 하며 인사하는 카페 사장님에게 마주 인사를 하다 벽을 들이받기도 했어. 사장님이 놀라서 떨어트린 케이크 상자는, 참혹한 형태로 내 몫이 되었지. 어쨌든 맛은 좋았어. 


 ‘나, 자고 가려고 잠옷도 챙겨 왔어’ 진진의 예고 없는 등장은, 이 곳에서도 예외가 없어. 쪼그려 앉아 가방을 뒤적이는 진진의 굽어진 등을 보고 있으니, 새삼 웃음이 나왔어. 저 검은 가방에서 잠옷이니 스킨이니 샴푸통이니 하는 것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볼 때마다 기가 막히고 새로워. 

진진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돌돌 말고 나와, 얼굴에 스킨이니 로션이니 하는 것들을 치덕치덕 바르고 머리를 탁탁 털었어. ‘예전에 키나가 죽었을 때 말이야’ 하고 말을 꺼내니 ‘응, 그 약해빠진 고양이’ 하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어. 진진은 털이 북실북실한 네 발 달린 짐승은 전부 다 싫어해. 


나는 아무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어. ‘키나가 없는 세상 따위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현실은 생각과는 달라서 죽을 것처럼 슬프기도, 또 그럭저럭 살 만 하기도 한 거야. 음식을 먹을 수도, 맛을 느낄 수도 있었어. 심지어 멸치 볶음이 맛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지. 키나가 없는 세상에 어떻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어. 나 자신이 뭐라도 팔아먹은 배신자 같았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니 진진은 ‘응, 그렇지. 맞아. 무슨 말인지 전부 알겠어’ 하며 웃는 듯 우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어. 진진과 나란히 누워 불을 끄고 세탁실이 어쩌고 자전거 코스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종알종알 늘어놓고 있는데, 어느 순간 진진은 대꾸가 없고, 귀뚤귀뚤인지 부엉부엉인지 하는 희미한 소리들만 가만히 공기를 울렸어. 


이 곳의 밤은 유달리 더 깊고 고요해. 가만히 숨만 쉬어도 낭만적이지만 그만큼 저항 없이 마음을 따라 걷게 돼.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끝엔 여전히 메타가 있을 테지. 미안해 메타. 지금은 안 돼. 거대한 고양이 눈 따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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