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를 읽고
저널리즘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활자나 전파를 매체로 하는 보도나 그 밖의 전달 활동, 또는 그 사업.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말의 뜻은 넓고 좁은 갖가지 의미가 있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저널리즘의 뜻은 점점 변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시작된 모바일 사회와, 이에 발맞춰 빠르게 발전한 광대역 인터넷 덕분에 기존 저널리즘의 구성원이던 신문과 방송은 입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매체가 대중을 향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내보내던 양상에서 대중과 매체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양방향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매체, 미디어 채널은 수없이 많아졌다.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 봐야 하는 채널이 많아진 것은 축복이다. 원래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대여섯 개의 메시지만 전달됐다면, 이제는 10개 아니 100개 이상의 메시지가 전달될 만큼 많은 매체가 생겼기 때문이다. 개인 채널도 매체, 미디어라고 본다면 더욱 많은 목소리, 다양한 시각이 등장하게 된 요즘이다.
그리고 축복임과 동시에 압박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이 전달되는 메시지와 독자들의 더욱 다양해진 수요를 따라잡는 것은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디어 채널의 변화는 항상 놀랍지만 요새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지 않을까. "요새 10대는 검색할 때 포탈이 아니라 유튜브를 이용한대요."
이제 미디어는 장사를 한다. 전통적인 저널리즘은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정보 이상의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기존 저널리즘의 가치라고 여겨지던 것들은 공정성, 객관성, 이해 충돌의 원칙 등이었기 때문에 정보 제시 이상으로 독자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버즈피드(Buzzfeed)는 콘텐츠와 제품 개발을 결합하면서 판매를 늘려나가고 있다. 수년간의 미디어 운영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영상 길이와 형식, 세세한 요소에 반응하고 공유하는지 데이터를 축적해 온 결과다. 이를 바탕으로 콘텐츠와 상품이 자연스레 연결되고 양방향으로 넥스트 액션이 이어지게 한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를 운영하던 기업이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던 기업은 미디어를 운영한다. 기존에는 각자 전문으로 하던 곳들이 협업하던 방식에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스스로 하는 방식을 택한다.
알고리즘은 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동하면서 미디어 생태계의 모습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알고리즘에 의해 개인이 보는 콘텐츠를 큐레이션해 각자의 수요에 맞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개입하면서 전통적인 기자의 역할도 혼란이 일어난다. 단순 사실 보도나 취재 영역에서 기자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큐레이션 작업을 잘 수행할수록 사람의 업무 관여 정도는 줄어든다.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규칙적인 반복 업무가 줄어드는 것이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것이 바로 이런 현상 때문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니까.
작년에 웹상에서 읽었던 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이 문득 떠올랐다. ‘개인의 취향이 질식당하는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질식당하지 않겠다는 작지만 강한 의지가 엿보인 글이었다.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아 꼼꼼히 읽었고, 클리핑을 하고, 인용을 하며 공유까지 했다.
그러다 또 만난 콘텐츠는 영상이었다. 내 취향이 과연 정말 ‘내’ 취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는 질문. 사실은 작은 스마트폰을 통해 큐레이션 되는 정보를 자주 접하며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빅데이터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우리에게 정말 ‘개인의 취향’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회의적인 시각이었다.
그 글과 영상이 동시에 떠올랐던 이유는 왜일까. 아마 내 선택이 의미 없는 결정이 아니라는 스스로의 확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사회의 빠른 변화 흐름에 발맞춰 가면서도, 나만의 구심점을 지켜야 한다는 은은한 강박증 때문은 아니었을까.
독자의 몰입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원래부터 몰입의 장르라고 한다. 시, 소설, 연극 모두 독자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사도 같다. 독자들의 몰입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기사 곳곳에 다양한 문맥적 장치를 심어 놓는다. 이런 과정을 '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스토리텔링은 중요하다. 독자나 청자의 몰입은 물론, 행동 유도에도 적극적인 액션을 가하기 때문이다. 발화자의 의도가 보다 더 잘 먹히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반드시 가미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미디어에 열광하고, 콘텐츠에 열광한다.
저널리즘의 의미가 더 광범위해지고,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이제 모두에게 친숙한 표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까지 저널리즘이라 해야 할까 - 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저널리즘의 미래에 대해 논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다만 우리 독자들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엄청 많은 파편들처럼 되어 버린 채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더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우리 대중은 아직 여기에 있다.
책 마지막의 편집자 주엔 이런 질문이 나온다. '뉴스의 경쟁자는 누구인가?' 사실 나는 나만의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구글 저널리즘 스쿨을 졸업하는 천재들이 만들어내는 뉴미디어 채널들일까? 아니면 뉴스보다 더 재밌는 콘텐츠가 쌓여있는 넷플릭스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뉴스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뉴스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빠른 변화 속도에 발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