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책이건 신문이건, 어떻게든 영어 활자가 들어간 무언가를 지니고 다녀야 했던 때가 있었다. 외국의 도시를 여행할 때면 길을 걷다 만나는 잡지 가판대나 책방엘 꼭 들러 그 안을 두리번거리는건 내겐 당연한 일이였다. 마치 보물을 찾아 헤매이는 마음으로. 지금 돌아보면 난 영어 공부 병에 걸려있었다. 어릴 적엔 그 대상이 패션 잡지였고, 한때는 그것이 그림 그리기였다. 난 무언가에 미쳐있지 않으면 안 되는 환자인건가 물음표를 달고나니, 어느날 나타난 책에선 사람의 욕구,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운명을 거슬러, 당신이 욕망을 다 버리고 원하는 것이 없게 된다면 그 삶은 곧 피폐해지고 무료해질거라고 하면서. 삶에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는 여기 인간의 욕구 이론에서 비롯된 듯하다. 늘 하고픈 것도, 원하는 것도 많은 나에겐 이건 틀림없이 힘찬 그린 라이트. 자, 그렇담 조금 더 신나게 원해봐야지. 그리고 이왕 원할거, 맑고 재미나고 평온하고 엄청 신나는, 고운 빛깔의 것으로 부탁해!
알아. 나만큼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걸. 나만큼 너에게 귀 기울여 준 이는 없단 걸 알아. 나만큼 너를 들여다보고 깊이 공감하고 기꺼이 같은 배에 올라타 함께해 준 이는 없단 걸 알아. 너 역시 내게 그런 존재였으니까. 너도 나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겠지? 어떤 날은 전화기를 붙잡고 나의 전화벨을 울리기 직전까지 간 날들도 많겠지. 알아,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괜스레 왠지 힘들다는 이유로, 외롭다는 이유로, 그립다는 이유로, 그 길로 슬픔에 잠겨버리지 않길 바라. 내가 네게 바라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니. 햇살 좋은 날, 그저 예쁜 골목을 거닐며 가볍게 웃길. 지나가다 만난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엘 들어가 가장 맛있어 보이는 메뉴를 주문하고, 천천히 그걸 음미하며 봉긋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끼길. 따스한 날엔 시원한 커피 한 잔 쥐고 골목골목 걸으며 꽃처럼 피길. 추운 날엔 진한 소설책 한 권을 쥐고 앉아 뜨거운 티 한 잔과 같이 깊숙한 곳을 느껴내길. 쓸쓸해 보이는 차가운 바다에 네가 홀로 우두커니 서있는 것 말고, 따스한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는 풀밭을 네가 기분 좋게 거니는 것. 거기서 아름다운 것들을 듣고 보고 느끼고 전율하는 것. 지나온 일들보단, 네가 원하는 최고의 삶을 곰곰이 선택해 그걸 살아내길. 지난 음지보다, 다가올 미지를 향해 설레길.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들은 그런 거란다. 이렇게 다 털어내고 보니, 좀 더 행복한 내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 아무 말 없는 너 역시 내게 바라는 건 그런 것들일 거란 걸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서. 행복하자. 쉼 없이, 열심히 행복하자. 네가 어디에 있건, 행복만 하자 우리.
당신의 책이 좋아요. 나를 빨아들여 며칠이고 당신의 우주에 갇혀 맴돌게 만드는 그 문장들의 힘이,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나의 머릿속 형체들이, 심장 어귀의 묵직한 이 감정이, 내 일상을 뒤흔들어버린 그 소리 없는 소용돌이가. 아무래도 당신의 책은 마법에 걸린 것 같아요. 눈으로 문장들을 따라 만져내면 그 마법은 시작됩니다. 모든 책이 그렇진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말해봐요.. 당신의 본업은 마법사인 거죠?
하루 종일 힘이 나질 않는 걸 보니 나 이 사람 그리워하네. 네가 그리워 힘이 나질 않노라 말하니 그는 나의 상태를 체크하고는 지프 끌고 해변으로 나가라고 말했다. 너에게 지금 필요한 건 비타민 D 같다면서. 차까지 끌고 나갈 기분은 아닌지라 대신 오늘은 종일 테라스에서 머물기로 했다. 날씨도 모처럼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이다. 젬스는 케냐에 가있다. 커다란 대자연이 펼쳐진 곳에 사람들이 가진 감각이 장식처럼 달려있고, 기술이 멀리 이곳저곳을 잇고 있는 곳. 친절하고 포근하고 평온해, 진짜 사람들이 사는 것 같은 곳. 비행기를 타는 새벽 전 밤까지 사자처럼 곤두서있던 그는 그곳에 도착하더니 광활한 대지를 마구 뛰다니며 넘치는 에너지를 주고받느라 행복해진 듯, 그의 좋은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지난밤에 그는 문득 (언제부터 해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그곳에서 살지 않을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글쎄, 나 역시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두바이에는 다시 여름이 올 건가 보다. 위로라도 하듯 아트 축제들이 불꽃처럼 파밧 열리고, 그 달콤한 설렘을 반짝 즐겨내고 나면 이내 혹독한 여름이 시작되겠지. 그걸 우리는 또 같이 이겨내고 있을 테고. 사실 이제는 뭐든 괜찮아, as long as we are together.
혼자 시간이 생기면서, 어디서부터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나인 건지, 어떤 것들을 거쳐왔고 또 얼마나 더 거쳐낼 수 있을지, 굳이 이름 붙이자면 나를 리셋하는 시간 같은 걸 갖게 됐다. ‘해야 하는’ 아무것도 내게 없을 때 나는 무엇이고 누군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남은 시간을 흘러가고 싶은지. 혹은, 남은 게 있긴 한지. 그 어떤 욕망들도 비우고 힘을 빼고 나니 신기하게 온종일 솔솔 잠이 쏟아진다. 마음속 솔바람 같은 것인가 이 느낌은. 비우는 것. 이곳저곳, 내 안에 공간을 다시 찾는 것. 내 것이 아닌 쓸데없는 것들은 놓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이런 여유로운 과정이 반갑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내게 와줘서 고맙다고 속삭이듯 몇번이고 말하고 눈을 뜨니, 오늘도 종일을 꿈 속이었네.
돌아갈 곳은 딱 한 곳이었다. 삶이라는 파티장 속, 너와 함께하는 일상. 온갖 찰랑이는 빛들이 평범한 척 놓여있는 곳. 그곳이 나를 보며 다시 들어와 춤추라고 손짓한다. 고마움에 난 말없이 웃으며 빛을 따라 첨벙- 한 올 한 올 잘 느껴내 보겠노라고 다시.
with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