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렀고 분명 직장생활도 했으니까 혼자 생활은 가능했다. 근데...
운이 좋게 4학년 2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한 회사에 채용이 확정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메뉴개발 분야라서 한 껏 들뜬 상태로 꿈만 가지고 원룸을 얻어 상경했다. 내실은 있는 스타트업(자영업으로 수년 간 영업하던 가게를 프랜차이즈화 하기 시작)이지만 어쨋든 스타트업, 급여는 많지 않았다.
4학년 1학기부터 취업을 알아봤지만 메뉴개발이라는 분야는 취업의 폭도 좁았고 전형적인 '경력직만 구해요'라는 형태였다.
이 분야 신입은 어디서 경력직이 되어야 하는가?
서울은 커녕, 경기도에도 연고가 전무했기에 어쩔 수 없이 원룸을 구했는데 월급으로 월세와 공과금 식비 등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저축할 돈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힘들었다. 애인도 없고 돈이 들어가는 취미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상경했다. '경력직만 구해요'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메뉴개발에 앞서서 매장근무를 조건으로 걸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판매중인 메뉴와 실제 매장에서의 오퍼레이션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수가 될 경력자를 채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매장근무를 시작하고 약속된 시간이 지났다. 본사로 불러졌으나, 사수는 없었다.
본사로 출근하고 이틀 동안은 딱히 맡겨진 일도 없었고 무얼 해야할지 몰라 컴퓨터로 인터넷을 했다. 매장 근무를 하면서 느낀점들을 나름 정리해왔던터라, 그것도 일종의 보고서 형태로 작성해두었다. 그리고 이틀 째 되던날 퇴근 시간이 되어갈 무렵, 직원 한 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나 내일까지만 출근해. 내일부터 인수인계하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분께서 하던 업무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앞으로의 모습은 더 몰랐다. 다음 날 이사님의 지시로 인수인계가 시작되었다. 본래 하고 계시던 업무는 구매와 발주 그리고 전 매장 재고 전산관리였다. 물론 이 업무가 메인이고, 부수적인 업무가 엄청 많다고 하셨다. 내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들킨 탓인지 걱정말라고 하셨다.
"너는 신입이고 차도 없으니 어려운 일은 안시킬거야."
물론 이 분도 내게 일을 시키는 대표님을 비롯한 상사분들의 의사는 알 수 없으나 상식적으로 그럴 것이다는 이야기였다. 인수인계는 3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아마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가맹점으로 납품되는 본사의 식재에 대한 거래명세서를 작성해서 점주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후 차례로 배워나간 이 업무들은 사용하시던 파일양식을 그대로 넘겨받았고, 차트에 있는 내용을 대입해서 처리하면 되는 방식이라 당장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아무리 그 업무의 100%를 다 받은 것은 아니지만 3시간만에 인수인계를 끝낼만한 것은 아니었다. 2달 동안을 퇴사한 분께 연락해서 괴롭혔던 것 같다. 물론 매일 전화한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것이 회사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겠냐만은 이 업무는 실수를 하면 매장영업에 차질이 생긴다. 가령, 물류창고에 고기를 발주해서 채워놔야 각 매장에서 물류창고로 발주를 넣어서 그 고기가 매장으로 배달될 수 있다. 하지만 까먹거나 오입력을 하면 매장에서는 장사를 못한다. 물론 매장에서 긴급재고를 갖고서 영업하기 때문에 당장 내일아침부터 장사를 못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물건 배달을 해주는 날짜가 아닌 날짜에 배달주문을 해야하기에 냉탑 퀵을 이용해야 한다. 물량이 많을 때는 아주 큰 차량을 써야하는데 이럴 때면 필요없는 큰 지출이 생긴다. 또, 점주들과 식재료 비를 두고 문서와 전화를 주고 받기 때문에 자칫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일이었다.
잠깐만 이 업무를 맡아달라던 대표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시간은 흘러만 갔고, 더 다양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그러다 어느 날, 가맹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같이 일했다는 분이 부장으로 오셨다. 매장에서 근무하시지만 메뉴개발 업무를 하기로 했다며... 이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드디어 사수가 구해진 건가? 드디어 메뉴개발인가?
잠깐 생각해보니 바로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부장님과 함께 메뉴개발 업무를 한다면 기존의 내가 하던 업무는 누가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대표님과 점심 겸 벤치마킹을 갔다.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이 놀랄 때,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입안 가득 먹고 있던 음식을 뱉어 낸다. 나는 이 날이 그럴뻔한 날이었다. 식사중에 대표님께서 하신 말씀때문이다.
"네 동기나 아는 사람중에 메뉴개발할 사람 없냐?"
'대표님 제가 메뉴개발할 사람인데요? 대표님께서 뽑으셨는데요?'
이 말이 목끝까지 나왔지만 그대로 뱉어내지는 않았다. 아마 이때부터 조금씩 회의감이 들고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이후로도 다양한, 잡다한 업무들은 계속되었다. 니 나이에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서울로 왜왔는가? 메뉴개발을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다 버리고 왔지 않는가?
그래도 회의감이 들기 전까지는 대표님을 비롯한 여럿분들께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뭐든 열심히 했다. 시키지 않아도 벤치마킹을 다니고 쉬는 날에는 가맹점에 인사차 방문하고 매장근무를 할 당시에 배정되었던 친정과도 같은 매장에 비타민음료를 들고 가기도 했다. 언젠가 기회가 올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적금으로 30만원씩 넣는 것 이외에는 저축을 할 수도 없었다. 재고를 못 맞추는 바람에 몇 번 사달이 났다. 그후로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근무시간인 것 같은 정신적인 데미지에 취미생활은 할 수가 없었고 시간날 때 만나서 같이 욕할 친구도 없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준비를 하며 직장을 알아보고 퇴사와 동시에 재취업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메뉴개발 업무로 취업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재취업이 언제쯤 가능할 지 가늠할 수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세와 생활비를 급여없이 버틸 생각을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원룸에 있던 짐을 용달차에 싣고 그 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생각했다.
'가을-겨울-봄 동안 일했는데, 메뉴개발과 관련된 업무를 해본 적이 없네. 다시 신입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