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원 May 16. 2024

'고즈넉함'을 알아차린 토요일 아침

이런 게 '찐' 행복이지.

  지난주 목요일 점심을 함께한 감사실장님께서 대뜸 "종원 연구원님은 주말에 뭐해요?"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나는 반사적으로 "이른 시간에 영화나 전시회를 보러 갑니다."라고 답했었다. 그러곤 나의 답변을 증명해 내듯 한 주의 업무를 마무리한 금요일 밤, 다음날 아침으로 정해진 미술관 방문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평일처럼 알람을 설정하고선 재빨리 잠을 청했다.


  회사에서 쌓일 대로 쌓인 피로를 풀어내기도 전에 평일에 출근하듯 토요일 아침 지하철에 몸을 실었고, 진짜로 출근하시는 미술관 직원분들 틈에 섞여 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은 9시 10분쯤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일찍이 방문한 곳은 성북동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보화각(=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으로 불렸던 간송미술관이다. 보수공사를 마치고 특별전(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을 한다는 소식에 치열한 티켓팅을 뚫고 설렘 가득히 기다려 왔었다.


  입장까지는 50분이 남았고, 미술관 앞 간이 카페도 이제야 파라솔과 의자를 설치하고 있었다. 카페 사장님이 너무나도 일찍 도착한 나를 의식한 듯 분주히 움직이시는 사이에 나는 미술작품 그 자체인 간송미술관이 재단장한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냈고, 파라솔이 모두 설치되는 걸 확인하고선 얼죽아 종신회원답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의자에 앉아 남은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입장이 40분 정도 남았을 때였다.


  토요일 아침에도 함께하게 된 생명수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북동의 능선을 따라 내가 좋아하는 한양도성의 성벽이 보였고, "아! 저런 주택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에서 '저런 주택'을 담당할 듯한 누군가의 아늑한 주택도 보였다.


  귓가를 간지럽히듯 지저귀는 새소리와 머리카락이 너저분해지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바람, 간간이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 은근히 코끝을 스치는 풀냄새.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모닝커피와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 월요일부터  쉴 틈 없이 나를 괴롭혔던 공과 사를 넘나드는 잡념들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갔음이 분명했다.


고즈넉-하다 「형용사」
  「1」 고요하고 아늑하다.
  「2」 말없이 다소곳하거나 잠잠하다.

  그 순간 "이런 게 '고즈넉하다'라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11478일을 살아오면서 고즈넉하다는 건 텍스트로만 이해할 수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고즈넉하다'를 설명해야 한다면 이렇게 설명하고 싶고, 또 정의하고 싶어졌다.

고즈넉-하다 「형용사」
「3」 아무런 간섭 없이 내가 중심인 좋은 시간의 연속


  한주에 몇 시간, 이마저도 어렵다면 미술관 입장 전 내가 느꼈던 찰나의 순간만큼이라도 '고즈넉함'을 꾸준히 느껴나가고 싶다. 더 정확히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 고즈넉한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 딱! 이 정도의 '고즈넉함'을 내 삶에서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나에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나요?"라고 묻는 순간이 왔을 때 "(나름) 꽤 괜찮게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지난주 토요일 아침부터 꽤 괜찮은 삶을 시작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투리는 못 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