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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May 20. 2024

결혼식장에서 공황이 와버렸다.

근데 왜 기분이 좋지?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결혼식이 있었다. 올해 2월 즈음에 '청첩장을 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나에게 청첩장을 주었던 친한 누나의 결혼식이었다. 누나는 자리를 정해놓았으니 꼭 밥 먹고 사진 찍고 가라며 바쁜 와중에도 나를 챙겨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결혼식장 체류시간은 15분 남짓이었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다음, 신부대기실을 들러 세상에서 제일 예쁜 모습을 한 누나를 보고선 곧바로 축의금을 내고 결혼식장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공황이 왔다. 이건 분명 공황이다.


  누나에겐 미안하지만, 타의가 아닌 자의로 결혼식장에서 탈출하다시피 했다. 신부대기실 나와 축의금을 내기 위해 건물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기다란 줄을 서야 할 때부터 공황의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참석한 결혼식 중에 가장 많은 하객, 신랑·신부의 부모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소리와 수많은 화환 속 자신이 보낸 화환을 찾기 위한 작은 실랑이. 평소에도 사람이 많고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게 가면 공황이 오곤 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결혼식 사진에 잘 나오기 위해 덥수룩해진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했건만, 공황의 증상인 '땀'때문에 앞머리가 찰랑찰랑하게 변해버렸다. 축의를 한 뒤에 자리에 앉아 안정을 찾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한 것도 오판이었다. 결국엔,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급하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벗어나니 공황의 증상들이 서서히 잦아들어 “다시 올라갈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여전히 찰랑거리는 앞머리를 보곤 마음을 다잡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상태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주머니 속에서 사용하지 못한 '식사권'을 마주했다. 공황 때문에 경황이 없던 터라 식사권을 받았는지도 몰랐는데, 왜인지 모르게 식사권을 보고 나서는 나의 마음이 서서히 정상을 향해 회복하기 시작했다.


  '신부 측 식사권 179' 내가 결혼식 시작 20분 전 즈음에 축의를 했고 내 뒤로도 장사진이 이어졌었으니 “적어도 300명 넘게 누나를 축하해 주러 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이더라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기에 결혼식장을 도망치듯 나와버린 나의 불편한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집에 도착해서 모든 긴장감이 녹아내리자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수많은 하객들도 결국엔 나와 똑같이 신랑·신부의 행복한 시작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한 장소에 모였던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 사실을 조금만 빨리 깨달았다면, 공황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결혼식에 오는 하객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중간점검표'이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누나의 결혼식에서 수많은 하객들은 나에게 공황을 주었지만 그만큼 누나가 좋은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2011년부터 알고 지낸 누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을 온전히 보지 못한 게 앞으로도 후회스러울 것이 분명했지만, 좋은 사람을 지인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과 언제인지 모를 나의 결혼식에서 누나처럼 좋은 중간점검 결과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공황이 왔던 낮과 달리 기분 좋은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누나 결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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