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션 좋은 민원인 덕분에 귓가에 쏙쏙 박히는 "XX 새끼"
목요일 17시 54분. 개인 휴대전화 번호로 사무실에 전화가 왔다. 민원인의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거친 숨결은 꽤나 긴 통화가 될 것 같았고, 좋지 않은 예감은 적중했다. 실제로 50분 가까이 비난과 조롱, 그리고 욕설을 한쪽 귀로만 견뎌내야 했다. 민원인은 기존 민원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다른 직원의 번호를 알려달라거나, 부서장을 넘어 기관장과 통화를 하겠다며 언성을 높여갔다. 특히나 이번엔 나에 대한 해임요구를 진행할 테니 인사부서장을 연결해 달라는 내용도 존재했기에 통화를 마치고서 받은 스트레스는 소송에서 졌을 때보다 더 컸다. 이번 민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행정기관에 요구하는 진짜 민원사항이 6% 라면 이를 부연 설명하기 위한 주변 이야기와 욕설이 94%에 해당하는 분명히도 ‘특이 민원’이었다.
“귀머거리냐? 좀 모자라냐?
병X 새끼, 시X 새끼, Dog새끼”
최근 김포시 공무원의 안타까운 사망을 계기로 '악성 민원'에 대한 대응 방안을 행정안전부에서 발표했다. 장관님께서 "민원인이 욕설, 협박, 성희롱 등 폭언을 하거나 정당한 사유 없이 장시간 통화하는 경우 민원공무원이 전화를 끊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브리핑을 진행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은 실제 상황에선 전화를 쉽사리 끊지 못하기에 이러한 발표를 공식적으로 한 것만으로도 공직사회에 주는 각인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악성 민원인에 대응하여 전화를 먼저 끊는 것이 일상화되면 이를 악용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악성 민원인에게도 자그마한 울림을 주는 게 더 시급해 보인다.
참고로 민원인이 폭언 등을 시작하면 전화를 끊어도 된다는 내용은 이미 '공직자 민원 응대 매뉴얼'에 기재되어 있었다. 매뉴얼에는 폭언 등 지속 시 통화곤란 안내 및 법적조치 경고 후 통화를 종료토록 하고 있으며, 친절히 "선생님 더 이상 상담이 어렵습니다. 폭언을 계속하시면 관련 법령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겠습니다."라는 표준 멘트도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어제의 나는 이러한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오롯이 '욕받이'로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공식 매뉴얼대로 욕설을 하시면 통화를 종료하겠다고 하자 민원인은 더욱 강력한 욕설을 퍼부었고, 법적인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고지했을 때는 지금 국민을 협박하는 거냐며 매뉴얼보다 한술 더 뜬 경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왜 민원전화는 먼저 끊지 못할까?
애매하긴 하지만 법적인 근거는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제4조 제1항에 있다. "민원을 처리하는 담당자는 담당 민원을 신속ㆍ공정ㆍ친절ㆍ적법하게 처리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같은 법 제5조에서는 "민원인은 행정기관에 민원을 신청하고 신속ㆍ공정ㆍ친절ㆍ적법한 응답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래도 '사명감' 아니면 '책임감'때문일 것이다. 너무 거창한 것 같은 사명감은 차치하더라도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 이러한 나의 의견을 부정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배정된 민원 때문에 다른 공직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큼은 가지고 있다. 전화를 끊으면 다른 직원에게 전화가 갈 것이고 이는 피해자를 양산하는 조치일 뿐이다.
행정기관이 악성 민원인의 말씀대로 중대하게 잘못한 게 있다면, 이는 분명히도 감사청구나 소송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순리이고 공직자는 그에 상응하는 징계나 처벌을 감수하면 될 뿐이다.
감사나 소송까지 이르지 못하는 대다수의 민원들은 나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고 있음에도 공직자들이 자신의 요구 수준을 만족하지 못하는 행정처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좀 더 나아가면 다른 국민들은 모두 잘 이용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자기만' 행정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때에도 민원이 주로 야기된다. 이 경우에 행정기관의 입장에선 한 사람만을 위해 따로 해줄 수 있는 행정사항을 찾는 것도 쉽지 않기에, '적극행정'과 '특혜' 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할 수 밖 없다.
나는 어제의 통화에서 민원인이 만족할 만한 민원 처리를 하고 싶었고, 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래서 민원인의 "고소한 번 해줄까"라는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발언에 무의식적으로 "선생님께서 저희가 잘못했다고 생각되시는 부분이 있다면 고소를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답변했었다. 이 발언이 민원인에겐 "어디 할 테면 해봐라."처럼 들리셨는지 역정을 내셨지만, 나의 진심은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미였다. 공직자가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 형사처벌을 받겠다."라는 말보다 떳떳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발언이 존재할까? 나의 기준에선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원인은 뒤이어 "죄송하다."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냐고 물었지만,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이미 수차례 국민신문고 답변과 통화를 통해 만족하시지 못하는 민원처리 부분에 대해 죄송함을 표시했다. 그럼에도 통화가 길어지고 똑같은 내용과 욕설이 반복되는 건 분명히도 다른 의도가 있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의심의 진위'를 구차하게 묻진 않는다. 어찌 됐거나 민원인도 국민이니까.
민원인도 국민이고, 공직자도 국민이다.
공직자들은 그냥 다른 국민들이 하지 않는 업무를 수행하는 소수의 국민일 뿐이다. 공직자에게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 상의 의무가 있듯이 민원인 또한 법률상 의무가 있다. 그저 민원인께서 아직까지 그 의무를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러기에 앞으로도 나는 민원인 스스로가 이러한 의무가 있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어제처럼 한쪽 귀를 벌겋게 물들일 것이고, 매뉴얼을 준수해 나가되 정부가 발표한 '법적 조치'라는 강력한 무기를 서랍 속에서 꺼내지 않기를 기원할 거다. 그래야. 모두가 만족스러운 민원처리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 」제5조(민원인의 권리와 의무) 제2항 "민원인은 민원을 처리하는 담당자의 적법한 민원처리를 위한 요청에 협조하여야 하고, 행정기관에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다른 민원인에 대한 민원 처리를 지연시키는 등 공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