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모델이 꼭 거창해야 될 필요는 없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예능보다는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를 즐겨 봤었고, 국내의 명소를 소개하거나 시민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알려주는 소재를 특히 좋아했다. 아무래도 꼬박 20년을 부산에서만 살아왔던 터라 다른 지역의 문화와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예능에서 나온 맛집을 방문할 때, 나는 다큐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를 찾아가 보는 게 소소한 일상의 재미였다.
KBS스페셜, 2009년 11월 22일 방송, 꿈꾸는 자들의 섬 - 노량진
KBS 다큐멘터리 3일, 2010년 3월 7일 방송, 별을 따다 - 신림동 고시촌 3일
시청했던 수많은 다큐 중에서도 고등학생시절 우연히 접했던 '노량진 학원가'와 '신림동 고시촌'의 일상을 담은 다큐는 방송을 넘어 나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야 공무원의 인기가 낮아졌다고 하지만, 다큐가 방영되었던 2009년~2010년만 해도 공무원은 중고등학생의 장래희망 조사에서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호 직업이었다. 나 역시도 수사기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을 희망했었기에 어찌 보면 다큐의 장면들은 내가 미래에 마주하여야 할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다큐에서는 다양한 모습들이 나왔다. 강의실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학원의 문이 열리자마자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모습이라거나, 교회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독서실에서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모습도 있었다.
결국엔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었던 만큼 수험생들의 식사도 조명되었다. 그들의 식사는 저렴한 고시식당(한식뷔페)이나 주먹밥을 먹는 게 대부분이었고, 거창한 식사라기보다는 공부에 필요한 에너지를 채우는 느낌에 불과했다.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는 한 장수생이 장기간 이어진 수험준비로 생활고를 겪게 되었고 공부에 필요한 문구류를 구매하기 위해 식욕을 절제하기도 한다는 인터뷰였다.
"자장면 먹고 싶어서 먹으면 정말 필요한 걸 못 사잖아요
공부할 때, 아니면 샴푸처럼 안 살 수 없는 것들을 못 사버리니까 안 먹다 보면 안 먹게 돼요"
수험생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는 커피 한 잔의 여유보다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마치 쳇바퀴 속 다람쥐와 같은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고생한다.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적어도 나의 눈에는 본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다큐를 시청할 당시에 고등학생의 입장에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초심을 가진 수험생들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공무원 시험은 어쩔 수 없이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뉘는 지극히도 슬픈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수험생들은 불합격을 마주하더라도 어김없이 다음의 시험을 준비하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그 당시 수능을 준비하던 나의 입장에선 다큐에 나온 수험생들이 나의 '롤 모델'이었다. 누군가는 공무원 수험생이 어떻게 롤 모델이 될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롤 모델은 나름대로의 '성장과정'을 거쳐 '성공을 경험한 사람'일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기에 우리는 롤 모델을 바라볼 때 당장의 ‘성공한 삶’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치열한 '과정'을 들여다보고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결국에는 합격이라는 성공을 마주하게 될 수험생들의 '초심'에 집중하고 싶었다. 최소한 노량진 학원가나 신림동 고시촌에 입성한 수험생이 "아! 나는 무조건 불합격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능 수험생이 공무원 수험생을 롤 모델로 삼아서 인지 다행히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서 상경을 했었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큐에서 보았던, 노량진 학원가와 신림동 고시촌을 방문했다. 다큐에서 보았던 대로 이곳은 밥을 먹으면서도 영어단어나 법조문을 외우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고, 스무살에 처음 마주한 노량진 학원가와 신림동 고시촌의 첫 느낌은 청춘의 매몰지가 아닌 그 어느 지역보다도 꿈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곳이었다.
나는 요즘에도 하고자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자 할 때에는 노량진 학원가나 신림동 고시촌을 방문하곤 한다. 카페의 창 밖으로 두꺼운 책을 들고 지나가는 수험생을 보게 되면 마음속으로나마 합격을 응원하고 카페에서 공부 중인 수험생들을 마주했을 때에는 그들의 ‘열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 청춘의 시간을 자신의 꿈을 위해 활용 중인 사람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를 나태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시험합격에 "운도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운'이 정말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지선다에서 사지선다로 또, 사지선다에서 삼지선다로 만들어내는 '운'을 가져오는 건 결국에 자기 자신이다.
나의 롤모델은 언제까지나 초심을 잃지 않는 수험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