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또는 만년필) 덕후의 텅장에 대한 항변
나는 문구류를 좋아하는 이른바 '문구 덕후'다. 학생으로 살아온 시간 동안 나를 도와주었던 연필과 볼펜 등등에 평균 이상의 애착을 보였던 것이, 성인이 되면서 귀여운 자금력을 등에 업고 문구점의 큰손이 되어버렸다. 다르게 설명해 보자면 어릴 때에는 항상 어머니의 "있는 걸 또 와 또 사오노"와 같은 잔소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회사 앞 사무용품점이나 문구 편집숍에서 '써볼까?' 하는 생각만 들어도 곧바로 문구를 구매할 수 있는 으른이 되었다(좁게 보아 만년필 덕후, 넓게 보아 문구 덕후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긴 하다).
큰손으로서의 첫 구매는 수많은 문구류들 중에서 '있어빌리티' 하나만 보고 장만했던 만년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일 LAMY 社의 '사파리'라는 제품을 통해 만년필을 처음 접하는데, 나는 무슨 심보였던 건지 대학생에게는 거금이었던 7만 원을 주고 'CP1'이라는 만년필을 선택했다. 막상 손에 쥔 만년필은 하염없이 불편했지만, 이왕 샀으니 뽕을 뽑아보자는 생각으로 조금은 억지스럽게 만년필을 사용했다. 그러다 종이에 잉크가 천천히 스며들 듯, 나도 서서히 만년필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만년필은 확실히 번거로운 도구다. 컨버터나 카트리지를 통해 잉크를 공급해 주어야 하고, 이따금씩 세척도 해주어야 한다. 또, 물을 기반으로 하는 만년필 잉크의 특성상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증발해 버려 정작 필요한 때에 사용할 수 없는 곤란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볼펜은 기름 기반의 잉크를 사용한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부분의 만년필은 캡(뚜껑)을 돌려서 열어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노크식 볼펜처럼 언제 어디서든 순식간에 꺼내어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들은 오히려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함과 조급하지 않은 태도를 알려주는 '특별함'이 되곤 한다.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만년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종이 위를 스치는 펜촉의 감각, 즉 '필감'을 즐기게 된다. 어떤 펜촉은 버터처럼 부드럽고, 또 어떤 펜촉은 종이를 사각사각 긁는다. 그 감각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레 만년필 사용에 대한 불호와 호의 갈림길에서 '호'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필감을 찾아 다양한 만년필을 구매하기 시작하고 이왕 구매한 김에 만년필로 다양한 기록들을 해나간다. 이렇듯 만년필이라는 도구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기록하기 위한 도구로서 일상에 녹아든다.
만년필을 사용하다 보면 불편한 순간들이 많이 있지만, 아주 가끔씩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주입해 놓았던 만년필의 잉크를 모두 사용한 순간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펜촉을 아래로 향하게 두고선 중력의 힘을 빌려 아주 작은 양의 잉크라도 더 써보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다 잉크가 진짜로 나오지 않을 때면 (조금은 변태처럼) 뿌듯함을 느낀다.
아! 이 펜으로 정말 많은 글을 써냈구나.
잉크를 모두 써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이 만년필로 무언가를 꾸준히 기록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묘하게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지고 '그래도 아직까지 잘 살고 있구나'라는 작은 안도감을 느낀다. 물론 이러한 뿌듯함과 안도감을 만년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숙제를 하며 몽땅해질 때까지 썼던 연필, 샤프에 넣어둔 샤프심을 모두 사용했을 때 또는 몸통이 투명한 볼펜에서 잉크의 수위가 서서히 줄어드는 걸 볼 때에도 작고 소박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문구(文具)'를 학용품이나 사무용품 등으로 정의한다. 반면, 동의어인 '문구(問句)'는 '모르는 것을 묻는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두 '문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용품은 배움을 위한 도구이고, 배움은 결국 모르는 것을 묻고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문구(文具) 「명사」 학용품과 사무용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문방구.
문구(問求) 「명사」 모르는 것을 알려고 물음.
학용-품(學用品) 「명사」 학습에 필요한 물품(物品). 필기도구, 공책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연필의 흑심이나 만년필과 볼펜의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면 그것들은 내가 써 내려간 시간이자 내가 배운 지식, 그리고 내가 남긴 흔적이 된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서사가 되고, 삶을 조금 더 수월히 버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문구는 그렇게, 우리를 조금씩 성장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