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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n 16. 2021

육식 이야기

발터 벤야민 에세이 <이야기꾼>에 비추어

 베르나르 키리니 소설집 <<육식 이야기>>가 6월 트레바리 모임에서 다룰 책이다. 글쓰기를 위한 모임이라 독후감 주제가 남다르다. 키리니의 글 중 하나를 골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각색하기다. 또는 책에 나온 단편 중에서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는 작품이 있다면 비슷하게 써보자는 제안이다. 당황스럽다. 결국 소설을 써보자는 뜻인데 단 한번도 문학적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다.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우선 책을 읽기로 했다. 그러고나서 생각하자 싶어 거대한 파리지옥이 표지그림으로 나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처음 접하는 형태의 서문에서 그는 뜬금없이 자신이 ‘피에르 굴드’라는 역사가, 또는 ‘피에르 굴드’의 후손인 다른 ‘피에르 굴드’로 행세한다고 선포한다. 이어지는 단편들은 하나같이 기발한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밀감> <착각의 나라> <기름 바다> <영원한 술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제목에 ‘이야기’가 들어간 이유를 알겠다. 모든 단편들이 누군가가 전하는 ‘이야기’다. <밀감>은 화자가 묵는 호텔 식당에서 만난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며, <아르헨티나 주교>는 ‘내’가 아르헨티나 주교의 주방에서 일하며 겪은 주교의 이야기다. 즉 화자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화자가 목격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다. 표제작 <육식 이야기>는 화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런 정도니까 <<육식 이야기>>는 마치 구전되어오는 여러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책을 읽고 글쓰기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했다. 먼저 나는 소설 형식으로는 글을 잘 쓸 수 없고, 쓰고 싶지도 않다. 나는 평론이나 분석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발터 벤야민의 문예 비평에서 핵심적이라는 <이야기꾼> 에세이가 떠올랐다. 내친 김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키리니는 벤야민의 이 에세이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강한 관련성이 있다. 더욱이 글쓰기 주제가 키리니의 글을 ‘모방’하기니까 ‘미메시스’이기도 하다. ‘미메시스’는 벤야민의 언어, 문예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니 모임의 파트너도 벤야민을 의식하고 글쓰기 주제를 제시하지 않았을까? 벤야민의 에세이를 ‘모방’하고 싶지만 아직은 무리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내가 쓰기로 마음먹은 글은 벤야민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이 소설집에 대해 따져보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겠다.


 “모든 위대한 이야기꾼들의 공통된 점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의 발판들을 마치 사다리를 오르내리듯이 자유자재로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 <이야기꾼> 중에서


  키리니는 서문에서 피에르 굴드라는 일종의 부캐를 내세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대개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이다. 키리니가 부캐를 내세운 이유는 그가 쓴 글이 벤야민이 말한 ‘소설’보다 ‘이야기’의 성질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소설가는 이야기를 잘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 경험이 부족하다. 벤야민은 이야기란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이라고 했다.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를 보면 환상적인 일화들 여러 개가 소개되고 있다. 키리니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고 굴드는 했다. 이야기꾼은 키리니가 아니라 굴드가 될 수밖에 없다. 단, 굴드라는 ‘이야기꾼’에 대한 소설은 물론 키리니가 쓴다. 그런데 소설도 이야기가 아닌가? 벤야민은 왜 둘을 구별했고, 키리니는 왜 소설보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책을 썼을까? 


 이야기는 말, 구전으로 전해진다. 소설은 글로 쓰여져 책으로 나온다. 이것이 출발이다. 말과 글 모두 사라짐에 대한 저항, 영원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말은 전해 듣는 각자에게 개인의 경험이 되지만 글은 박제된 채, 타인의 경험으로 머무른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꾼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자신의 이야기든 전해들은 이야기든 어쨌든 이야기에서 취한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그것을 다시금 자기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경험으로 만든다. 소설가는 자신을 고립시켰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이다. 이 개인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모범적인 예로서 표현할 수도 없고, 조언을 받지도 않았으며 또 조언을 해줄 줄도 모르는 개인이다.” - <이야기꾼> 중에서


 첫 모임에서 다루었던 작가 제임스 설터의 단편소설을 읽으면 피에르 굴드의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다.  <어젯밤>에 나오는 인물들은 중산층 속물이다. 단편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인물들은 자신의 밑바닥 일부를 내보이게 되며 그들의 관계는 파탄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에도 없다. 벤야민에 따르면 “조언이란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어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과 관련된 어떤 제안이다.”  소설 속 인물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안에서 고정된 채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런 소설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감상을 나누게 된다. 얻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교훈이다. 우리가 조언을 구할 때 어떤 말이 가장 와 닿는가? 경험을 이야기할 때다. 내가 <밀감>을 읽고,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면 신나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책에서 본 이야기지만, 말을 하다 보면 내가 여자의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있는 듯이 묘사할 것이다. 내 경험이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 경험과 기억이 된다. 그리고 마치 내 경험처럼 또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책에 실린 이야기에 다른 내용을 덧붙여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말한 ‘미메시스적 능력’이다. 


 <<육식 이야기>>가 벤야민이 말한 ‘이야기’의 특성을 지녔다 해도 어디까지나 책에 쓰인 글로 나오지 않았는가? 이야기와 소설의 근원적 출발이 다른데 저자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려고 했을까? 벤야민은 러시아 작가 레스코프의 작품을 이렇게 평했다. 레스코프는 곧 개봉하는 마블 영화 <블랙 위도우>와 박찬욱이 감독한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에 나오는 영국 배우 플로렌스 퓨가 주연해서 이름을 알리게 된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원작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썼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이야기꾼’인 작가다. 


 “기이한 일, 놀라운 일이 극히 정밀하게 이야기되지만 사건의 심리학적 연관이 독자에게 강요되는 일은 없다. 독자는 이야기를 자기가 이해하는 식으로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고, 그로써 이야기된 것은 정보가 지니지 못하는 어떤 진폭을 얻는다.” - <이야기꾼> 중에서


 아까 이야기란 경험을 나누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대인은 점점 이 능력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소통 형식인 ‘정보’가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정보는 ‘그 자체로 이해 가능한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정보는 사건들의 소식인데, 설명이 곁들어져 있다. 그래서 즉각 검증될 수 있다. 정보는 이제 이야기와 더불어 소설까지 위협한다.  키리니는, 아니 굴드는 레스코프처럼 이야기하려고 했다. 정보와 비교하면 이야기는 역설적이다. 이야기도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 그런데 정보가 내용이 중요하다면, 이야기는 전달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고 할 수 있다.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읽은) 우리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기억이 왜곡되어 다른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이야기가 아닌게 될까? 오히려 새로운 버전으로 생명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굴드의 이야기는 이런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 소설은 어떨까?


“이런 방식이 얼마나 문학에 대한 사랑을 북돋우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거에요. 그쪽 나라에서 젊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아요. 말 그대로 탐욕스럽게 먹어치운(devorer)답니다.” 이어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독서, 처벌받지 않는 악행이죠.”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


“소설을 읽는 독자는 고독하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소설의 독자는 그 소설의 소재를 남김없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어느 정도 그것을 집어삼킬(verschlingen)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그는 마치 불이 벽난로 속의 장작을 삼키듯이 그 소재를 파괴하고 집어삼킨다.” - <이야기꾼> 중에서


 불어 devorer과 독어 verschlingen은 모두 ‘삼키다’란 뜻을 가진 동의어다. 이야기가 이야기꾼을 거치면서 조언을 주고, 진폭을 얻어 새로운 생명력으로 물든다면 소설은 ‘집어삼켜져’ 끝내 독자에게서 사라져 버린다. 키리니가 굴드를 내세워 시도한 <<육식 이야기>>는 이야기로서 성공했을까?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정보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획득했을까? 오렌지 껍질 여자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워 버렸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할 이야기로 기억했을까? 나는 성공했다고 여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다. 내 경험처럼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과 <이야기꾼>의 공통점 하나를 더 짚어보려고 한다. 굴드는 서문에서 <권태의 일반적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공허의 일반적 역사>를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의 권태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녀가 권태 속에서 공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것은 우주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한편,  의미심장하게 벤야민은 권태가 이야기꾼의 필수적인 태도라고 했다. 


  “이야기들을 심리학적 분석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숙한 간결함보다도 더 그 이야기들을 기억에 지속적으로 저장되게끔 도와주는 것도 없다(……)사람의 심리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동화 과정은 이완의 상태를 필요로 하는데, 이런 이완 상태는 오늘날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꿈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권태는 이완의 정점이다. 권태는 경험의 알을 부화하는 꿈의 새이다.” - <이야기꾼> 중에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건 이완된 정신의 상태, 즉 권태라는 말인데 이해가 간다. 다른 일에 관심이 쏠려 있다면, 예를 들어 모바일 게임이나 도박에 빠져 있다면 누가 이야기를 하고 싶겠는가? 권태에 빠져 있을 때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란 얼마나 매혹적일까?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죽음에서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가 살아온 삶 - 이야기가 되는 소재로서의 그 삶 - 이 임종에 이른 사람에게서 비로소 전수될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제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권위를 갖는다. 이야기의 기원에는 바로 이러한 권위가 있다. 죽음은 이야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인준이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우주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무서운 진실’이라 최후의 치명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곧바로 죽어버릴 거라고 굴드는 말했다. <권태의 일반적 역사>와 <공허의 일반적 역사> 모두 별책부록이 <고인들의 목록>이라는 점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록이 왜 미완성인지도. 권태는 삶에서 가장 죽음과 가까운 태도가 아닌가. 권태와 죽음은 공허를 공통 개념으로 가질 수 있다. 이야기의 기원이 죽음에서 나오고, 이야기를 숙성하는 상태는 권태이며, 이야기로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되면 죽음이라는 이 순환을 보라. 현대의 정보로 대변되는 목적지향적 삶, 시간의 화살과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육식 이야기>>는 서문부터 각 단편들까지 모두 시간의 화살로서 단일한 시간의 흐름에 있지 않다. 순환하는 시간의 고리에 맺어져 있다. 기이하고 신비한 상상력, 심리 상태를 강요하지 않는 자세가 <<육식 이야기>>를 벤야민이 말한 의미에서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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