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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l 05. 2021

안전은 안전할까?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 주제 - 안전의 역습

<서울리뷰오브북스>를 구독하길 참 잘했다. 정식 창간호 이전 준비호로 나온 0호는 코로나19시대가 바꾼 세상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중에서<감시자본주의 시대>를 리뷰한 박상현의 글은 사용자의 데이터를 그러모은 ‘행동잉여’가 마르크스의 ‘잉여노동’을 대체할만한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책을 읽지 않고 리뷰만 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 모르지만, 충분히 숙고할 가치가 있는 개념이라고 믿는다. 정식 창간호인 1호는 ‘안전의 역습’이란 주제 안에서 문학, 사회학, 진화생물학, 사회복지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소개하고 현재 우리가 마주한 복잡한 현실을 돌아보게 했다. 이 주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저자들이 ‘안전’이 가진 양면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서 인상깊었다. 그리고 ‘감시자본주의’와 바로 연결되는 주제가 ‘안전의 역습’이기도 하다.  


 안전의 양면성이란 뭘까? 안전하면 좋은거잖아! 할 수도 있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안전은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예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고와 재난은 아무리 잘 대비해도 올 수밖에 없다. 그때, 어떻게 대처하는지까지 안전에 포함된다. 떠올리기 죄스럽지만 세월호 참사가 우리의 안전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돌아보면 이해할 것이다. 범죄, 폭력, 사고, 재난, 갑질, 불공정 모두가 안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내면은 단일한 형용사로 설명하기 어렵다. 가정에서는 모범적이고 상냥한 아버지가, 직장에서는 후배들을 심하게 갈구는 악마일 수도 있다. 동양의 옛 성현들이 꿈꾸었던 어진 자들의 나라는 유토피아보다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남에게 ‘안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런게 가능하다면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없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안전의 대상을 인간 사회에서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안전을 위한 여러 조치가 행해진다. 문제는 이런 안전을 위한 조치가 자유의 침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범죄 예방 조치로서 가장 광범위하게 도입되는 각종 감시 기술이 반드시 범죄에만 사용되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자동차 블랙박스가 본래의 용도 외에도 배우자의 외도를 감시하는 기기로 널리 쓰이는 일이 한 예이다.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 기술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서도 나올 정도다. 이런 기술이 중국에서는 대중을 통제하는데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인터넷 검열로 체제에 반대하는 의견을 즉각 삭제하고, 안면인식 CCTV를 통해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확하게 가려내 벌금을 매긴다. 이런 감시 체제가 코로나 유행 때, 극단적인 도시 봉쇄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또, 우리는 거대 IT기업에게 자발적으로 또는 별 생각없이 중요한 데이터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CIA보다 페이스북이 특정한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인터넷 상에는 연인이나 배우자의 바람을 SNS로 확인하고 캡처해서 유포하는 일이 거의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일반 시민들도 이정도 일을 할 수 있는데 국가 기관이나 거대 기업이 나서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두렵다. 안전을 우선시하면 정부와 국가의 개입을 요청해야 한다. 감시와 통제와 증명이 꼭 필요해진다. 민주주의 사회는 (성년이 된) 개인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전제에서 성립할 수 있다. 정부와 국가가 시시콜콜 개인의 행위를 조종하고, 감시와 통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곳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과연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안전을 추구하는 추세는 세계적이다. <1호>에는 그런 사례를 여럿 소개한다. 먼저 ‘무해’라는 개념이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무해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우리 사회를 열어본다. 나는 2021년의 한국이 1980년대에 비해 덜 폭력적이라 생각한다. 국가, 사회, 기업, 가정, 개인 사이가 다 그렇다. 국가는 이제 대학에 전투경찰 부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 경찰의 최루탄이나 쇠파이프에 죽는 사람은 요근래 들어본적 없다. 광범위하게 일어나던 인신매매는 없진 않겠지만 의식하기 힘들 정도로 줄었다. 대낮에 노조 간부를 쇠파이프로 폭행하던 일도 지금은 대단한 뉴스일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거나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일도 예전과는 밀도가 다르다. 그럼에도 안전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은 확연히 줄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의 폭력은 더 촘촘한 그물로 우리를 감싸게 됐다. 순위를 매기는 경쟁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경쟁은 우리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커져가는 불안 속에서 기댈 곳이 없다. 이런 때에 범죄나 갑질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겨우 지켜가던 마음의 끈을 끊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럴 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삶 전체를 심연으로 밀어넣는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위안을 얻는 것과 관계를 끊어서 상처받을 일을 없애는 것의 리스크를 따질 수밖에 없다. 후자가 리스크가 낮은 것이다. 무해한 존재란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다.  


 ‘무해’와 관련되어 생각나는 글이 있다. 미술전문기자 문소영이 몇 달 전에 쓴 기사를 아직도 가끔 읽는다. 칼럼 제목이 <의절 대신 손절한다, 사람이 자본이 됐으니까>다. 손절은 원래 주식투를 할 때, 내가 샀을 때보다 떨어진 주식이 더 떨어지기 전에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팔라는 말이다. 손절이 내포한 의미는 사람 관계도 투자처럼 본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손절한다고 말한다면 보통 내가 이만큼 했는데 상대가 그만큼 돌려주지 않았을 경우에 이루어진다. ‘의절’은 주고받음의 공정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 사회적, 정치적 이상이나 도덕적 행위와 관련이 있다. 가족이라도 반역죄를 저지르면 ‘의절’하는 것이다. 오랜 친구라도 정치적 이상이 달라지면 ‘의절’하는 것이다. 이제 의절은 거의 없다. 인간 관계도 ‘공정’하게 주고 받아야 한다. 사람의 관계는 때로는 어느 한쪽이 넘칠 수도, 부족할 수도 있다. 연애가 그렇게 시작되지 않는가? 지금은 이 연애도 ‘공정’한 게임으로 변하고 있다. 공정과 손절의 개념이 드러내는 바는 이제 인간관계에 깊이 파고들 여유가 없다는 극도로 경쟁화된 사회의 단면이다. ‘공정’ 개념의 범람은 ‘무해’한 관계를 향한 욕구와 닿아 있다. 


 ‘무해’함이 대세가 된 계기는 역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유행이다. 남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게 되는 일은 내가 코로나를 앓으면서 아픈 것보다 훨씬 나쁜 일이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런 집단의식과 국가의 강력한 행정조치가 맞물려 작동하면서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와 더불어 심리적 거리도 늘렸다. ‘무해’는 사람간의 소통과 협력을, 따뜻한 정을, 타인과 가까이 지내며 느끼는 친밀감을 줄인다. 한편으로 나는 한국사회에서 소통, 협력, 정, 친밀감을 새롭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므로 지금의 상태가 반드시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족처럼 생각해서 그랬다.” “딸 같아서 그랬다” 갑질과 성추행의 변명으로 반드시 나오는 말이다. 가족 안에서도 분명히 위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말이다. 공적으로는 서로간의 ‘무해’함이 반드시 필요한게 아닐까? 사적으로는 다르다. 친밀한 관계는 ‘공정’한 관계가 아니다. ‘손절’은 친구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만난 사람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아주 가까운 사이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작동될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곧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이게 가능할까? 생명체는 주변 환경과 다른 생명체와 상호작용을 해야만 살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다. 식물도 광합성만으론 살 수 없고 균사체라든지 다른 식물이라든지 토양 내 미생물및 동물과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살아간다. 동물, 식물만 생명이 아니고, 우리 몸 안의 미생물들도 생명체다. 내 몸의 장내 세균총이 하는 일을 가리켜 내가그들을 착취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경계를 세우면서 동시에 경계를 열어야 한다. 이때 서로 좋기만 할 수는 없다. 공생은서로 좋은 일만 할 수는 없다. 경계를 여는 일은 어느 정도 위험성을 감수하고 감행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행위이다. ‘안전’의 추구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무해’함을 지향한다.  


 김홍중은 한국에서 ‘무해’함의 추구가 과도한 안전주의는 아니라고 본다. 세월호와 미투 등을 거치면서 여러 위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우리’의 안전에 대한 연대감이 있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 주장이 일면 맞지만 오히려 과도한 안전주의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우리’에 대한 연대감과 불안, 그리고 공포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배척과 혐오에 연결된다. 인류학자 조문영은 <불안한 빈자는 어쩌다 안전의 위협이 되었는가?>에서 이 부분을 다룬다. 


 안전을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운다면 필연적으로 안전을 위협하는 주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빈민,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사회적 약자의 대표 격인 성소수자도 각자가 가진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처지가 다르다. 오히려 이들이 ‘우리’를 만들어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를 배척하는데 앞장서기도 한다. 숙명여대에 입학하려던 트랜스젠더 학생을 배척한 사건이 있다. 또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시리아 난민이 한국에 들어오는 일을 반대한 일이 그 예가 된다. 만약 ‘안전’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다른 약자를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 들어오지 말라고 만드는 식이 되면 안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대개 이런 쪽이다.  


 그리고 가난은 거대 테크 기업들의 좋은 착취 대상이다. 우선 국가가 빈민을 관리하는 도구는 점점 정보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복지 혜택 수급 자격도 요즘은 다 온라인으로 심사한다. 이때 들어온 정보는 개인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다. 또, 가난한 사람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이들은 돈이 안 될거라 흔히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소비를 할 때, 기업이 추천하는 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행동잉여’를 만들고 이에 따라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또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빈민이 관리 대상이며, 안전을 위협하는 주체로 여겨진다면, 그래서 이들이 배척된다면, 안전에 대한 요구는 줄어들까? 내가 빈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불안이 더 커지고 안전에 대한 감수성도 더 늘어날 것이다. 빈민을 몰아낸 곳이 제아무리 안전해도 더 안전함을 바라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신조어를 분석한 글이 <취소가 문화가 되지 않으려면>이다.  


 ‘취소문화(cancel culture)’라는 말은 작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1호>를 읽으며 처음 알았다. 사회적 지탄을 받을만한 잘못된 언행을 한 사람에 대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운동을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미투운동이 있다고 한다. 글에는 없지만 나는 요근래 자주 일어난 연예인 학폭 고발이나 SNS에서 유명인의 언행을 가지고 ‘조리돌림’하는 일도 같은 취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일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강고한 성적 불평등의 위계가 깨뜨려지기 시작했다. 순간의 실수로 여겨졌던 일이 누군가의 커리어 전체를 침몰시킬 정도로 큰 일이 되었다. 또, 사회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함부로 내뱉으면 안된다는 의식을 심었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가지고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공격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 또한 자아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다.  


 “순결함이라는 발상, 항상 정치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발상, 이런 건 빨리 극복하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은 어지럽고,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정말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결함이 있다(……)다른 사람을 최대한 비판적으로 대하는 게 변화를 만드는 길이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요약하면 도덕적 완벽주의, 순결함 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취소 문화는 자유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발상이라는 비판이다. 이런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연예인 학폭 폭로를 보면서 과거의 잘못으로 현재의 성취를 이정도까지 무너뜨려야 하는가 안타까웠다. 또, 아무리 사과를 해도 부족하고 결국 예전 가해자의 완전한 몰락을 봐야만 만족할듯한 거센 공격이 지긋지긋하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무조건 엄벌만 내리라는 단순한 분노만 가득한 댓글창은 암담하기까지 하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칙은 다양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이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협동하고 토론하여 이해를 높이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회 규범을 창출하는 것이다. ‘취소 문화’는 잘못된 말 하나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판단하고 끌어내리는 행동이 아닌가?  


 나는 어른의 기준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젊을 땐 하나의 기준을 통해 흑과 백으로 사람을 나누었다. 내 정치적 이상에 동의하는 사람은 옳고 나머지는 모두 내 운동의 대상이거나 적이었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취소문화’에는 적잖은 반감이 든다. 한편, 젊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도 있겠다는 이해도 간다. ‘취소문화’가 있는 현실은 인정하지만, 위험한 문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취소문화를 소개한 송지우는 <취소가 문화가 되지 않으려면> 글 뒷부분에 생각지도 못한 논지를 펼친다. 그도 나처럼 취소문화를 인정하지만, 위험성을 경고하는 결론을 내릴거라 짐작했다. 제목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젊은 세대가 엘리트를 향해 취소를 확장하려는 것은, 그것이 이상적인 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랜 구조적 차별과 제도적 불공정에 맞설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해서일 수 있다.” 


 이 문장을 읽고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내가 안전에 대한 이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의 경험을 글에 반영할 만한 사례가 하나도 없다!! 즉, 나는 대한민국에서 주류, 40대, 남성, 이성애자, 고학력자, 서울 거주 등등으로 살면서 실제로 안전에 대한 요구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안전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쓴 ‘무해’, ‘안전’, ‘취소문화’를 우려하는 내용은 내 입장과 관점에서만 나왔다.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이런 깨달음이 오니까, 젊은 세대에서 생겨난 이런 문화가 강고한 엘리트 지배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전략일수도 있겠다고 갑자기 생각이 바뀐다.  


 내가 가진 세계관은 나이가 들면서 얻은 지혜일수도 있고, 세상에 적당히 물든 속물이 되어서 가지게 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오랜 시간과 경험의 축적으로 가지게 된 생각이기에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겪어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러고보니 사실 ‘무해’에 대해서도 그렇다.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는게 안타깝지만, 한국에서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소통과 협력에 대한 요구는 공산주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명료하지 않은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이 이제서야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싫어하지만, 자본주의를 차갑고 냉혈한 돈의 망령 정도로 보면서 사람들 사이의 정을 무조건 높은 가치로 평가하는 관점은 더이상 옳지 않다. 자본주의보다 더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로 작동한 수많은 예가 있다.  


 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체득한 가치와 현재 젊은 세대의 절박함이 불러온 문화가 조화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이상과 안전에 대한 요구는 같이 갈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빈민도 외국인 노동자도 성소수자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안전의 우산 아래에서 동등하게 설 수 있을까? 아마 지금 어느 누구도 속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난 이럴 때 질리기보다 호기심을 더 느끼고 싶다. 지금은 그렇다.  


 인간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원이 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언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소통의 기본이자 문명의 초석이다. 이 언어 자체가 모순 덩어리다. 역설의 온상이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의 한계이기도 언어의 한계일수도 어쩌면 우주의 물리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레 질려서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세상의 문제를 풀려고 할수록 더 어려운 문제가 계속 생겨난 덕분에 문명이 이처럼 발전했다고 믿는다. 안전, 민주주의, 소외, 가난, 감시자본주의가 어지럽게 뒤얽힌 세상의 일부분을 <서울리뷰오브북스>를 통해 알게 되어서 기쁘다. 나의 한계와 젊은 세대의 절박함을 깨달아서 좋다. 더 생각할 문제가 많고, 읽어야 할 책이 늘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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