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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Feb 17. 2022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집 

 삶은 우리에게 기쁨과 쾌락을 선사한다. 덕분에 힘겨운 세상을 살아갈 만하다. 그러나 기쁨은 슬픔이 남긴 여운 속에서 찾아오고, 쾌락은 고통과 더불어서야만 의미있다. 때로는 고통과 슬픔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삶이 선사하는 선물들은 그 자체로만, 단독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다단하고 인간은 수없이 얽힌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삶은 명쾌한 논리와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감정과 느낌, 생각과 욕망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형용하기 어려운 흐릿한 안개 덩어리와 같다. 우리는 이것들을 원재료로 삼아 가공하여 삶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이 가공한 결과물이다. 결과물 안에서 원재료는 그 형체를 찾아보기 어렵게 변형된다. 그렇다면 삶의 원재료가 고스란히 드러난 소설이 있을까?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집 <달걀과 닭>이 우리의 마음이 가공하기 전의 원재료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단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인과로서 글이 이어지지 않는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과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나온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다른 일이 항상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런 인과관계가 생존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뇌는 사소한 단서들을 조합하여 인과관계를 만든다. 뇌는 패턴을 파악하고 분류하는 능력을 발휘해 사건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조합하여 인과를 구성하고 이해한다. 이는 추상적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 인과는 사건들이 가지는 시간의 선후 차이일 뿐이다. 먼저 생긴 일이 나중 생긴 일을 만든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과는 수학 연산이나 증명처럼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인과가 실제 물리 세계에서 의미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인과를 통해서 사건을 파악하고 이해를 할 수 있다. 삶의 원재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달걀과 닭>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야기도 아니고, 인과관계도 없다. 문법에는 맞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과 단어들이 이어진다. 마법이나 초능력이 있는 세계보다 더욱 환상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 다르다.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과 내용 모두가 다르다. 의식의 단속적 연계라고 해야할까?  마음의 흐름은 죽 이어지지 않고 끊어졌다 다시 시작한다. 그렇다고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낼 수도 없다. 난해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홀린 듯이 읽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이 글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뇌가 구성한 단순하고 명쾌한 삶의 서사 말고, 내 존재가 세상에서 받아들인 날것의 삶 말이다. 인과도 논리도 시간도 없다. 뚜렷한 감정과 느낌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규정하기 전에 우리의 뇌가 처리하는 자극과 신호들이 글로 써진 것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번역자인 배수아 작가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단편 전체가, 나아가서는 책 전부가 한꺼번에 내 몸을 파고드는 기분이 든다. 뇌가 취사선택한 인과만이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삶 전체가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소설을 읽고 이런 느낌을 처음 느꼈다. 


 이쯤 되면 작가에 대해 말을 해야겠다. 번역자가 소개한 작가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극적이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강간당한 어머니는 성병에 걸렸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임신을 감행했다. 생후 2개월 만에 기근과 유대인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자라서 고위 외교관과 결혼해 자녀를 두었으나 글쓰기에 빠져 들었다. 남편과 헤어지고 명성을 얻었지만 평생 금전문제로 고달팠다. 소설가로서 버지니아 울프와 비견되고, 외모는 그레타 가르보를 연상시킨다는 그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그녀의 삶처럼 작품도 그렇다. 책의 첫 작품이자 표제작이며 작가가 가장 아낀다는 <달걀과 닭>은 어쩌면 그녀의 삶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 아닐까?


 달걀은 세포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지극히 단순한 생명체다. 하지만 그 안에 모순과 고통과 기쁨과 쾌락이 다 들어있다. 삶의 원재료다. 우주가 탄생하기 전의 혼돈(카오스)처럼. 그래서 자아가 없다. 자아는 세상을 분석하기 위해 나름의 해석 구조를 쌓기 위해서만 탄생한다. 만들어진 이야기를 듣는 존재다. 이야기를 만들기 전의 달걀에겐 자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이다. 영혼은 자아가 아니다. 영혼은 존재의 본질로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닭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다. 닭은 달걀의 운반자로서만 의미있다. 닭은 달걀을 보존하지만 달걀을 볼 수 없다. 보더라도 흐릿한 무언가로 볼 뿐이다. 파악할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있는 힘껏 삶을 살아가지만 본질을 알 수 없듯이. 달걀과 닭의 관계는 인과도 논리도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하나의 존재도 아니다.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관계가 있는 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삶이 그렇지 않았을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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