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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May 12. 2023

몸의 노래

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답답하고 보수적인 대구와 다른 서울에서의 자유는 20살 풋내기를 들뜨게 만들었다. 공부는 뒤로 하고 술과 동아리에 빠져 살았다. 결국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IMF 경제 위기를 지나며 앞날을 고민했다. 내가 그때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대학입시였다. 다른 길을 찾기보다 잘 했던 길을 다시 한 번 가자고 결심했다. 운이 좋아서 수능을 아주 잘 봤다. 의대, 한의대, 치대 중 어디를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한 마디 던지셨다. 우리 집안에 의사와 치과 의사는 있지만 한의사가 없으니 네가 한의대를 가라. 그렇게 난 한의대를 갔다. 특별한 사명감이 없었고 목적의식도 뚜렷하지 않았다. 


 한의대에서 배우게 된 한의학은 무척 어려웠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인체의 생리와 병리, 그리고 자연의 산물을 배합하여 약으로 사용하는 본초학과 방제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신 서양의학 과목은 쉽고 재미있었다. 시험 때, 한의학 과목은 제대로 공부해도 기껏해야 C가 나왔지만, 서양의학 과목은 대충해도 A 아니면 B를 얻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적성은 한의대가 아니라 의대라고 느껴졌다. 그렇지만 다시 새로운 길을 갈 용기도 자원도 없었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가 된 후 15년이 지났다. 쉬지 않고 한방병원, 요양병원, 일반 한의원까지 다양한 곳에서 일했다. 내가 한 한의학적 치료 덕분에 몸이 좋아졌다고 감사 인사를 전한 사람도 많았고, 치료 받아도 별로 효과가 없다며 실망한 사람도 많았다. 때로는 보람을 느끼며 뿌듯함에 전율했다. 그러나 잠시일 뿐이었다. 점점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기본적으로 인체를 바라보는 관점은 서양의학적이기 때문이다. 한의학 학문 자체에 자신이 없다보니 한의사로서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한의사일까? 아니 어떤 한의사가 되어야 할까? 한의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이는 내가 한의사로서 살아가는 내내 붙잡고 있는 질문이다.


 그러다가 이 책 [몸의 노래]를 만났다. 일본의 의사학자 구리야마 시게히사가 썼다. 그는 일본에서 침술사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동양과 서양에서 어떻게 다른가를 역사적으로 탐구했다. 히포크라테스 시절(기원전 460~370)이나 마왕퇴 문서 시절(기원전 168년 경)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양과 서양은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사람의 몸을 바라보게 된다. 저자는 이 관점의 차이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서양의 ‘박동(pulse)’과 동양의 ‘맥(脈)’에서 찾는다.


 동양의학에서 맥, 특히 맥을 짚어 진단하는 기술(진맥)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근대 이전 서양에서도 동맥의 박동은 중요했다. 갈레노스(129~199?)는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양 의학을 지배한 고대 의학의 완성자로 유명하다. 그는 박동에 대해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지금은 박동이 한의학에서의 맥과 달리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맥박수(Heart Rate)만 활력 징후로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다. 동양과 서양 모두 처음에는 맥(박동)이 전달하는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어쩌다 큰 차이가 생겼을까?


 첫째로 서양의 박동(동양의 맥과 다른 표현을 쓰고 있음에 유의하자)은 해부학적 관점에서 처음 정립되기 시작했다. 떨림, 경련, 두근거림이 박동과 아무리 비슷해도 해부학적 기원은 완전히 다르다. 한의학의 맥은 다르다. 맥은 단순히 혈액이 흐르는 관이 아니다. 오히려 강물의 흐름, 강 그 자체와 비슷하다. 고대 서양에서 연구한 박동은 심장, 혈관, 압력과 관련이 있다. 갈레노스는 동맥의 수축이 실제로 일어나는지 여부를 정성들여 따졌다. 한의학에서는 다르다. 맥은 피의 기운, 몸의 기운이 흐르는 경로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둘째로, 세상을 감각하고 인식해 표현하는 방식, 또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 한의대에서 맥을 배울 때 나는 혼돈에 빠졌다. 맥에는 28가지 맥상이 있다. 그런데 각각의 맥상을 표현하는 말이 의학적 엄밀성과 거리가 멀었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차 있어서 두보의 시보다 더 해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고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레노스가 남긴 방대한 기록을 보던 후대 학자들의 한탄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사람이 느낀 촉각 감각을 객관적으로 엄밀성을 갖춘 언어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나 중국에서나 똑같이 맞닥뜨린 문제였다. 단지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달랐다.


 촉각 감각의 인식이 불명확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서양인들은 언어의 선명함에 집착했다. 왜냐면 그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맥박, 펄떡펄떡 뛰는 동맥은 의사가 그 사람의 몸을 촉진해 느끼는 감각과 구별되는 본체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인식의 대상(환자의 맥박)과 주관성에 의해 왜곡되는 인식작용(의사가 환자의 맥을 짚어 감각한 내용)을 분리했다. 그리고 실재(맥박)과 인식(촉각 감각)을 대립시켰다. 불명확한 주관적인 촉각 감각은 객관성을 잃었다. 대신 분명하게 실재하는 대상이 있으니 이를 선명하게 표현할 언어가 필요하다. 그들은 지각의 배후에 있는 객관적 사실을 확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언어의 모호함을 씻어내기 위한 시도가 갈레노스 시대부터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 결과 맥박에서 박동수만 남았다. 가장 선명한 언어인 숫자만 남고 나머지는 버린거다. 


 한의학에서는 촉각 인식의 불명확성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의사들은 처음부터 명확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동양의 세계 인식에서는 현상과 본체의 구별보다 경험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상과 인식, 언어를 엄밀하게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한데 모여 경험을 구성하고 경험이 곧 본질이다. 한의사들은 대상과 인식 모두가 실재라고 여겼다. 대상과 인식이 모두 실재하는 대신 언어가 실재에 대립된다. 즉 언어가 선명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감각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가 주관적이다. 서양이 주관적 감각을 벗어난 객관적 언어를 이상으로 여겼다면 동양은 주관적 언어를 통해 객관적 감각을 얻으려 했다. 그러므로 이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긴맥은 마치 동아줄을 만지는 듯하다”와 같은 말로도 한의사들이 맥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이 책의 1부 동서양의 촉진이다. 나는 이 책을 좀더 철학적으로 리뷰한 글 https://sokionchoi.wordpress.com/author/sokionchoi/page/11/ 을 참조해 대부분의 표현을 이 링크의 글에서 빌려왔다. 


 2부 동서양의 시선에서는 서양의 근육과 동양의 안색을 대비시켰다. 서양인들에게 근육은 단순히 몸의 일부가 아니다. 근육은 “의지적 움직임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근육은 우리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지 선택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의지적 행동과 비의지적 과정을 구분한다. 근육은 우리를 참된 주체로 만들어준다. 근육에 대한 인식의 대두는 개체성이라는 특별한 개념의 대두와 뗄 수 없다. 특히 근육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따라가면, 자발적 의지에 대한 의식이 구체화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근육에 대한 관심은 자아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제 정신(=영혼=자아)이 몸(근육)을 지배한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근육을 바라보는 시선과 교차된다. 


 서양에서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육이라면 동양에서는 안색이다. 안색은 단지 얼굴의 색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비언어적 표현 전부를 포함한 한 사람의 총체적 정보다. 이런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을 알려고 할 때 “안색을 살핀다.” 서양에서 근육이 내포하는 의미가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 자아의 발명(발견),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동양에서는 몸과 마음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고 한꺼번에 드러난다. 안색을 살필 때, 몸과 마음은 구별되는 별개가 아니다. 


  3부 존재의 스타일은 동서양에서 주로 다루는 병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주제로 삼았다. 서양의 이원론에서는 물질과 정신 중에서 정신이 더 중요하며 우선권을 가진다. 정신(영혼, 자아)이 물질(몸)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신이 주체가 되고, 몸은 객체로서 타자화된다. 그러므로 고대 서양 의학에서는 몸에 탁한 피가 과도하게 많은 상태를 가장 주의해야할 병의 원인으로 보았다. 타자인 내 몸이 나쁜 피로 썪지 않으려면 이 피를 빼야 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가장 중요한 치료법이 사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의학은 다르다. 동양 전통에서 타자는 내 몸의 바깥에 있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인 나를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 병의 원인은 나의 바깥에서 온다. 그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하고 일년 내내 영향을 미치는 바람(風)이 가장 주된 병인이다. 


 책을 읽고 동서양의 차이를 정리해보니 서양은 해부학적 시선, 몸과 정신의 이원론, (언어의) 선명함을 추구하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동양은 몸과 정신의 일원론, 감각 인식 곧 경험의 실재함, 적극적으로 상관성을 반영하기 정도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왜 한의학을 어려워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서양인들처럼 사고했다. 실제적 경험이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지식이든 정확한 언어로 기술되어야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모호한 언어로 뒤덮인 한의학에 깊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언어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 입각한 감각을 본질로 보는 관점을 갖추는 일이 가능할지 겁이 나지만 그래도 노력할 생각이다.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은 부분도 있다. 동서양의 인체관이 완전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앞에 맥을 다룬 1부에서 확인한 것처럼,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해서 차이가 벌어진 것이 아니다. 출발점은 비슷하지만 각각의 문화적 전통에 의해 경로가 달라진 것 뿐이다. 나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 한의학의 경로를 다시 밟을 수도 없다. 단지 내게 허용할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동서양 인체관의 차이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세계관,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차이가 인체관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을 다룬 내용이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특히 서양의 박동을 다루면서 언어, 실재, 인식의 철학적 개념을 가져와 분석한 부분은 어려웠지만 다른 글을 검색해 찾아볼 정도로 인상깊었다. 이 부분은 다른 책을 통해서 더 알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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