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作
여러모로 쉽지 않은 책이다. 특히나 종교가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유독 어렵게 느껴졌다. 학창 시절 마지못해 읽었던 성경인지라, 기억에 남은 내용도 많지 않거니와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맞는지 확신도 그다지 없었다. 게다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다 보니 내용 자체가 쉽지 않고 가독성이 좋지 않았다. 수학 철학 또는 선문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읽을 때처럼 난해하기만 했다. 내용에 대한 이해는 차치하고, 하나의 동일한 문장에서 출발하여 다각도로 증명해내고자 하는 작가의 논리력과 소설적 구성에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그럼에도 책은 강력한 흡입력을 뽐낸다. 딱딱하고 재미없다며 내팽개칠 만도 한데, 롯과 하갈과 이삭과 야곱의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가 궁금해 멈출 수 없다. 성경의 창세기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신의 뜻과 그에 따라 변해가는 인물들의 삶뿐이다. 그 인물들이 어떻게 신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들을 요구하는데 말이다. 인간은 인간일 뿐 신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신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살리라 다짐하여도 인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소설은 그 간극을 메워준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설 속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엿보고 나면 인물들의 선택을 제법 수긍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작가의 바람대로 소설을 통해 신의 마음, 그리고 믿음의 문제에 대해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창세기의 일화를 들으면 얼굴을 찌푸리게 되고, 인간에게 이런 방식으로 믿음을 확인하는 신의 요구가 온당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여전히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 ‘카인과 아벨’ 이 보여주는 이야기에 좀 더 공감한다. ‘카인과 아벨’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구약성서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카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리고 여호와의 의지와 행동에 강한 의문과 불만을 품는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임에도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호와를 믿음에도 가난하고 고통받고 아픈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탄으로 하여금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 간의 전쟁을 방관하거나 혹은 선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태어난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노아의 방주에 타지 못한 죄 없는 인간들의 죽음은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지금도 나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카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 한편에 줄곧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질문이 불경스럽다거나 그저 믿음 없는 자, 그리고 사탄의 놀음에 놀아나는 자들의 허황한 질문이라는 지적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하게 된 일’을 읽고 난 지금은 되려 누구보다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믿고 싶은 자의 절실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나는 인간이기에, 무엇이든 인간적인 관점에서 번역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아직 미지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다. 다만 이승우 작가의 소설적 번역을 통해 ‘사랑’ 또한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다른 앎의 세계를 열어 주었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p. 118
보이지 않는 눈이 더 세세하고 더 은밀하게 잘 본다. 보이는 눈 앞에서는 생길 수도 있는 경계심이 보이지 않는 눈 앞에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p. 19
길 위의 사람은 어딘가로 가는 중에 있는 사람이다. 길 위에서 사는 것은 어딘가로 가는 중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도착은 한없이 연기되고 머묾은 영원히 유보된다. 어딘가로 가는 중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사는 것만 허용된다. -p. 32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내보일 수 없고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잠깐 위장할 수는 있지만 오래 속일 수 없고, 한때 감출 수는 있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p. 61
떠나기 위해 갈 곳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떠나지 못한다. 어디를 향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부터 움직이는 것이 핵심이다. 도착해야 할 어딘가를 향해서가 아니라, 떠나야 할 어딘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야 떠날 수 있고, 그래야 어딘가에 이를 수 있다. 도착할 그곳은, 그곳이 어디든, 도착하기 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어차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곳이 이미 존재하고 너무 존재해버린, 말하자면 더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 p. 72
이것 역시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속이 가득 차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말을 하면 말한 만큼 달아나버려 아무리 많이 말해도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신비.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더 많이 말하게 되는 비밀. -p. 122
결핍과 균열, 고뇌와 혼란을 겪지 않은 자는 허기를 모른다. 버려진 경함과 죽음 속에 있어보지 않는 자는 탐식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 -p.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