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씩 느리게 사는 법.
2019년 1월 1일.
평생 올 것 같지 않던 나이. 아버지는 이미 나를 키우고 있었을 나이, 2002 월드컵 때 서른이었던 국가대표 수비수 최진철이 경기에 지쳐 쓰러지는 것을 보며 '늙어서 저렇다'며, 오만과 경솔함을 가득 담아 비난을 퍼붓던 삐뚤어진 13살 이대한은 그렇게 '늙은' 서른이 되었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서른이라는 나이의 무게를 한층 무겁게 하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생각한다. MP3로 노래를 듣던 중학 시절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서른즈음에를 듣던 DJ와 패널들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며, '정말 쓸쓸하다! 최고의 노래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박수를 쳐대는데 중학생이 뭘 알리가 있나 그저 이 노래가 공감가는 나이가 어서 되어봤으면 했다.
20대 배우들 중에는 조금 더 농익은 연기와 폭넓은 표현을 위해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는 것을 반기는 이도 있다 한다. 스크린을 보아도 20대와 30대의 연기는 세월에서 오는 존재감부터가 다른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서른이 된다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으려나 기대해보지만, 요즈음의 우리 사회에서 서른이라는 나이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있나 의문이 든다.
청년들의 사회진출속도가 늦어지면서 서른이라는 나이가 가지는 무게감이 많이 가벼워진 것이 사실이다. 서른들은 서른즈음에에 더 이상 공감하지 않고, 오히려 마흔이 되었을 때 이 음악에 더욱 공감한다 한다. 어릴 적 서른 둘이던 막내이모가 '노처녀' 딱지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따라서 '현대 나이 계산법'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시대 변화와 현대인들의 사회 진출 속도를 감안한 실제 나이를 계산하자는 취지로 현재 나이에 0.8을 곱한 것이 실생활의 진짜 자기 나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실제 현대 나이는 24살. 이렇게 해서라도 나이의 부담감을 피해보자고 할 수도 있지만 난 오히려 24살이라는 나이에 더 공감이 간다.
'취향'이라는 것이 생길법한 나이 스물 네살.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 무수의 쏟아지는 컨텐츠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려낼 수 있는 나이. 수없이 스쳐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지인을 알아볼 수 있는 나이. 굳이 서른은 이래야 한다. 스물넷은 이럴법하다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히려 우리의 서른이 취향을 만들어가는 나이라는 해석이 더 맞을법 하지만, 사회가 규정하는 서른에 약간은 빗겨가고 싶은 바램이 작용된 듯 하다. 난 아직 스물 넷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서른. 등 떠밀려 공부하고, 등 떠밀려 대학엘 왔다. 그러다보니 취직만은 등 떠밀려 하고싶지 않아서 남들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삶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서른. 이제서야 '취향'이라는 것이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삶은 어떠했으면 좋겠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누군가는 24살 즈음에 생겨나기 시작할 자기다움이랄까.
미혼에 백수로 시작한 서른.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채로 시작한 서른이라 더욱 반갑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하고,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시작점에 서 있다. 스물을 만났을 때보다 약간의 부담감이 어깨에 내려 앉은 이 느낌이 싫지가 않다. 이런 여유로 새로운 10년을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마흔이 되었을 때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비로소 그 주옥같은 가사에 공감을 하며 담배 한 대 피고 싶다. 아무튼 아직 난 내 나이가 서른임을 잊고 있겠다. 정확히 10년씩 느리게 사는 것이다.
마침 날씨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