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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 Legged Creature Jan 07. 2021

폭설, 그리고 상처의 기록

그 날의 감정 톺아보기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고, 길이 얼어붙은 날이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나는 '내 삶에도 배경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브금에 취하는 사람인데 그 장면은 음악없이 차가운 바람 소리와 정적과 약간의 소음만이 전부인, 그런 순간이었다.


제주에 유례없이 폭설이 쏟아진 겨울이었다. 은행에 가면 제주 토박이들이 40년만에, 70년만에, 내 평생 처음이라며 저마다 경쟁하듯 그해의 폭설에 경이를 표했다. 20cm씩 눈이 쌓였고, 바람이 유난히 거셌던 동쪽에선 눈보라가 내 허리를 잘라버릴 기세로 가로로 몰아쳤다. 내 일터에서는 폭설이 쏟아진 첫 날 '러브레터'며 '겨울왕국'이며 영화 OST를 틀어 하얀 눈이 가져다주는 찰나의 로맨틱함을 즐겼지만 결국 며칠씩 이어지는 폭설에 계속계속 쌓여가는 눈을 치우며 추위와 지겨움 속에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2018년 2월, 성산읍 출근길 풍경

그날은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시린 날이었다. 회사에서 제공해 준 숙소에서 회사까지는 걸으면 20분, 차로는 3분 거리였는데 도로가 그 정도로 얼어붙은 줄 모르고 차를 끌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기왕 나왔으니 3분만 살살 가보자'는 마음으로 빌라가 있는 골목에서 나와 왕복 4차선에 접어들었고, 사거리와 로터리를 한번 지나면 금방 회사가 코앞이었다. 


그렇게 시속 20km 정도로 엉금엉금 기어가다 신호 걸린 사거리에서 멈추려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차는 브레이크가 먹히지 않은 상태로 돌돌돌돌 계속 굴러갔고, 운전 경력이 짧아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던 나는 앞차를 콕 들이박을 때까지 당황과 황당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 어?'만 반복하며 허탈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양쪽 모두 큰 충격은 없었는데 차에서 내린 나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의 원인은 안구건조였다. 찬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줄줄 흐르는 탓에 그날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을 오해한 앞차의 차주 분은 '사고가 처음이냐/ 이런 경우 흔하다/ 당황하지 마라/ 보험사에 전화하고/ 가까운 정비소를 알고 있으니 같이 가주겠다' 등등 사고 경험 전무한 나를 친절히 챙겨주셨다. 인명피해는 없었고, 앞차는 SUV, 내 차는 경차였던 탓에 앞차의 플라스틱 범퍼에 금이 갈 동안 내 차만 앞범퍼가 와장창 박살이 난채로 엔진까지 살짝 밀렸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모두 보험으로 깔끔하게 처리.


SUV의 차주 분은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출근 방법을 고민하던 나를 회사까지 태워다 주셨다. 육지 분인데 사업 때문에 제주에 자주 온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러고 몇달 후 퇴사 여행을 가 있는 동안 뜬금없이 연락이 한번 왔었는데 따로 답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3분 거리를 30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사무실은 적막했다. 넓은 오픈 공간을 통합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 사무실에 10~15명쯤 있었을까... 나는 오는 길에 접촉 사고가 났다고, 와 대박, 나 사고 처음 났다고, 20km 정도로 오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더라고, 다행히 좋은 앞차 분이 드러눕지도, 뒷목을 잡지도 않고 친절히 정비소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회사앞까지 데려다 줬다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시 나는 4-5명 정도의 팀원들을 꾸린 팀장이었는데 나 스스로도 목적을 알 수 없이 위에서 떨어지는 일들을 쳐내기에 급급했고, 그 겨울의 눈보라처럼 사방에서 날아오는 오만가지 일들을 핸들링하지 못해 휘청거렸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집을 떠나 있었던 탓에 일주일에 5일씩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던 동료들이 있었지만 가만히 있다가도 그냥 눈물이 쏟아졌던 그 날들에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불꺼진 방에서 혼자 남은 일을 하곤 했었다. 평일, 주말을 통틀어 업무시간 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이미 피날레를 울린 프로듀스101를 틀어놓고 멍~하니 보고 있던 나날들이었다.


자리에 앉기 전, '나 오다가 접촉 사고가 났다'고 말을 뱉었는데 우리팀 팀원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 철저하게 고립된 섬이 된 것 같았던 차가운 공기가 여전히 피부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간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적을 만들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일과 사람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 당한 것만 같았다. 기대고 싶은 사람들은 서울에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업무시간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소리내어 울었던 날들. 


나의 업무 방식과 인력 관리가 잘못된 것도 있었지만 그 상황이 온전히 100% 나만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당시의 나는 내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 몰랐고, 나에게 너무 소홀했던 탓에 몸도 마음도 아팠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나는 그게 팀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팀도 지켜지지 않았다. 말이 가시처럼 나갔었고, 표정은 차가웠다. 팀원들 또한 회사생활과 타지생활로 여유없이 지쳐있었는데.


폭설로 길이 얼어붙는 날, 연관검색어처럼 따라붙는 그 정적과 외면은 아마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더더욱 선명하게 기억하려고 한다. 학습된 상처는 여운을 오래 남기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는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워지지 않기를. 다시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를 스스로 외면하지 않기를. 나를 챙기는 것이 내 주변을 챙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적당한 온기로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관계를 이어가기를.

어느 겨울, 한라산에서 만난 오리들

시간이 지나 많은 관계들이 회복되었고, 좋았던 일부는 여전히 좋은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그 중 한 명에게 '오리 눈집게'를 구걸해 선물 받기로 했다. 시리도록 차가웠던 그 기억 옆에 올해는 오리 한 마리 두어야겠다.

2018년 2월, 성산읍 출근길 실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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