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지방선거와 투표 - 비례대표제
1. 아카펠라
2. stem(de): 표는 곧 목소리
3. 거짓 없는 광고, 자신 있는 투표 독려
4. 네덜란드 비례대표제에 관한 몇 가지 사실과 숫자
5. 지방선거, 투표와 결과
6. 덧붙임: stem 파생 단어와 표현
단일선거구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evenredige vertegenwoording)란 해당 의회의 관할지역(입법권이 미치는 지역)을 나누지 않고 그 지역 전체에서 각 정당 지지 표를 집계하여, 총 득표수 대비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것을 뜻한다. 정당에 대한 지지의사뿐만 아니라, 정당이 내세운 후보들 중 한 명을 특정해서 선호를 표시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정당 후보의 당선 순서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개방형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라고 부른다. 네덜란드 국회(하원; Tweede Kamer)와 도의회(Provinciale Staten), 지방의회(시의회; Gemeenteraden)가 모두 이 방식으로 구성된다.
비례대표제는 사표, 소위 죽은 표를 최소화한다. 네덜란드 하원에서 정당이 1석을 차지하기 위한 '최소 득표율(kiesdrempel)'은 의석수가 150이기 때문에, 총 유효표수의 0.67%이다. (독일과 벨기에는 5%, 스웨덴은 4%이다.) 즉, 네덜란드에서 특정 정당의 득표수가 총 유효표수의 0.67% 이상만 되면 최소 1석을 얻는다. 이 때 정당 별 의석수를 할당하는 방법은, 총 득표수를 총 의석수대로 나눈 수인 "할당수(kiesdeler)"로 해당 정당이 받은 득표수를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총 300만 표가 있었고, 의석수가 150이면, 1개 의석 당 2만표기 때문에 46만표를 얻은 정당에게는 23석을 준다. 네덜란드는 공식 법으로 '최소 득표율(kiesdrempel)'을 정해두진 않고 있다. 도의회면 도의회, 지방의회면 지방의회, 각 선거의 '유효표수를 의석 숫자대로 나눈 할당수(kiesdeler)' 충족을 최소 1석 배정의 기준으로 삼지, 봉쇄조항이 없다. 이로 인해 득표율과 의석수 간의 비(非)비례성이 네덜란드는 평균 1.21% 인데, 한국은 평균 21.97%에 달한다.
출처: 표 8.2 1945-2010년 간 36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선거 비(非)비례성 평균과 (입법부선거에서 사용된) 선거제 유형. (Lijphart, 2017: 188-189)). Lijphart, Arend (2012). Patterns of Democracy. Government Forms and Performance in Thirty-Six Countries. Yale University Press. 김석동 역 (2017). 민주주의의 유형.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똑같이 300만명이 투표했고, 국회 의석수가 150개인 상황에서,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대표제라면, 한 정당이 받은 표가 전국 집계로 예를 들어 8만 표(4%)를 넘어도, 각 선거구에서 최대득표수를 차지한 후보가 1명도 없다면 6석은 커녕 1석 얻기도 불가능하다.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내가 소신껏 지지하는 정당이 비록 소수 정당이라 해도 그 정당의 득표 비율대로 의석을 얻을 수가 있다. 얻은 표만큼 의회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표결 시 의회 내 과반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공공 예산 편성과 그 집행,결산에 관해 자료를 열람하고, 적어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의회 바깥에서 고성을 높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와 의미를 지닌다. 더 효과적이다.
반면, 단순다수제 혹은 다수대표제에서는 각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지지표를 받은 후보만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한다. 의회가 심의하는 예산과 결산을 집행하는 행정 단위 별로 정당 지지 표를 총 집계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행정 단위를 여러 선거구로 나누고, 각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는 후보만 대표가 된다. 이렇게 하면 어차피 가장 많은 표를 받을 후보에게 던진 표가 아닌 이상, 내가 던지는 표는 의회 내 의석수 배분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의회 내에서 법안에 대해 토론할 때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의사를 표명해 줄 목소리, 나를 대표해 줄 목소리가 사라지는 셈이다.
네덜란드는 1918년 기존의 지역구제(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즉 각 선거구의 최다득표자를 하원에 보내던 제도를 전국 단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바꾸었다. 1918년 개정 헌법은 25세가 넘는 모든 성인 남자의 참정권과 성인 여자의 피선거권, 비례대표제, 사립학교에 대한 정부 지원이란 세 가지 큰 변화를 둘러싼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다. 여자의 피선거권(입후보권; 정치인으로 선출될 권리)이 참정권으로 확대된 것은 1920년이다. 아무튼 1918년 개정 헌법 상 비례대표제 도입은 1848년 수정헌법에 기초한 근대적 입헌군주제로의 변화 이후 매우 큰 정치적 변화였다.
헌법 53조 1항에서 국회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명기하고 있다.
Article 53 1 De leden van beide kamers worden gekozen op de grondslag van evenredige vertegenwoordiging binnen door de wet te stellen grenzen.
양원(상원, 하원) 의원은 법이 정한 한계 내에서 비례 대표의 원칙에 따라 선출된다.
1918년 개정헌법 81조가 현 헌법 53조로 이어진다. 해당 조항의 변천사는 이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례대표제 도입은 20세기 초 진보 정당들의 아젠다였다. 1918년 개정헌법 탄생은 1917년 12월 12일 국회 합의로 가능해졌고, 당시 국회는 1917년 6월 15일 선거 결과,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100석 중 24석이 가톨릭정당, 21석이 자유연합(Liebrale Unie), 15석이 사회민주노동당(SDAP), 10석이 자유진보주의자당(Vrije Liberalen), 12석이 반혁명당(ARP), 9석이 기독역사당(CHU), 8석이 자유민주연합(VDB), 1석이 기타 당에 돌아갔다. 가톨릭정당과 반혁명당, 기독역사당 등 기독 계열이 총 45석, 자유주의 계열이 39석이었고, 15석이었던 사회민주주의노동당은 자유주의 정당들과 함께 참정권 확대와 비례대표제 도입에 뜻을 같이 했다.
당시 기독 계열 정당들은 전국에 펼쳐진 교구 조직과 연계하여 소선거구제 하에서 최다득표수를 얻기가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했다. 반혁명당을 선두로 기독 정당들이 원했던 교육법안(공립 학교뿐 아니라 사립 학교에 대한 정부 지원을 정당화하는 법안)과 자유주의 진보 정당들이 원했던 (재산에 상관없는) 참정권 확대와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고 받은 결과, 1918년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네덜란드 비례대표제 도입을 눌러싼 논의와 도입 배경, 정치적 의사타결 과정, 이후 선거 운동 양상, 향후 선거제도 변천에 관해 분석한 연구보고서에서는 1918년 비례대표제 도입을 '어둠 속에서의 도약'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도입 당시 비례성의 원칙을 실천에 옮기는 데 대해 많은 이견이 존재했고, 당시 유효하던 1887년 헌법에서는 소선거구제를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헌법 개정 없이는 단일선거구 비례대표제 도입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Loots, 2005: 55). 즉, 당시 앞이 캄캄해보이던 선거제도 개혁을 일거에 이뤄낸 셈이다.
https://www.ru.nl/cpg/publicaties/overige-publicaties-0/sprong-duister/
저자: Anne Bos, Ron de Jong en Jasper Loots
제목: "어둠 속에서의 도약: 1918년 단순다수대표제에서 비례대표제로의 변화. 비례대표제 도입 동기와 선거 캠페인에 미친 효과, 1918년 이후 계속된 개혁안(들)에 관한 논의 연구."
Een sprong in het duister. De overgang van het absolute meerderheidsstelsel naar het stelsel van evenredige vertegenwoordiging in 1918. Een onderzoek naar de beweegredenen voor de invoering van de evenredige vertegenwoordiging, de effecten op de verkiezingscampagnes en de discussie over verdere hervormingen na 1918
2005년. 네이메이헌(Nijmegen)대학교 인문학부 의회역사연구센터 연구보고서. 네덜란드 내무부(Ministerie van Binnenlandse Zaken en Koninkrijksrelaties) 출판.
네덜란드는 독일처럼 지역구제와 연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아니다. 단일선거구 순수 비례대표제로 의석수와 득표율 사이의 비례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국회 내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 253석과 정당득표율대로 배분하는 비례대표 47석이 공존하는 '병립형'이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대로 할당한 정당별 의석수 내에서 의석을 우선 각 지역구 당선자로 채우고, 그러고도 의석이 남으면 정당이 정한 비례대표 후보 순서대로 채운다. 이 방법의 특성 상, 독일 연방 하원은 지역구 숫자(299석)만큼 정당명부 의석수(299석)를 둔다. 정당 별 총 의석수는 총 정당득표율에 근거해서만 정하고, 지역구 선거는 누가 그 할당된 의석을 채울지 결정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독일식을 '연동형 비례대표제'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학자와 전문가, 시민운동가의 의견대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더 적절해 보인다. 정당에 대한 신뢰가 낮은 우리나라 정치 문화 상, 지역구 별로 후보 면면을 좀 더 밀착 검증하고 소통할 수 있고, 정당에 제시한 후보 명부를 유권자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후보의 인물 됨됨이에 관한 국민의 직접 평가가 함께 가능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장점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바른정당이 내세운 중대선거구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보다 훨씬 못하고, 단점이 커 보인다. 선거구마다 정당 득표율과 의석수 간의 비율이 달라질 뿐더러, 표의 등가성이 지켜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선거구에서 5명까지 당선시키기로 할 경우, 5등한 의원의 득표율이 5%가 되지 않아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즉, "상황에 따라 민심 왜곡이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출처: 송채경화, 2017.)
우리나라도 문재인표 대통령 개헌안에서 국회의원 선거의 비례성 원칙을 명시하도록 규정했다 (헌법개정안 제41조) . 그러나 당장 헌법 개정 없이도, 국회에서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가능하다.
날은 빨리 지나갔다. 어느덧 집으로 투표소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배달되어 있었다. 또 지나니 투표용지(개방형 정당후보명부; kandidatenlijst)도 배달되었다. 마지막으로 투표권 증명서(stempas)를 담은 봉투도 배달되었다. 드디어 대망의 3월 21일 수요일! 선거날 집 앞 투표소에 가서 투표했다.
투표 전 아침밥을 먹으며 급히 각 정당 공약집과 후보를 확인하고 비교했다. 폰으로 검색하니 각 정당 지역 누리집에서 공약집을 PDF로 내려 받아 볼 수 있었고, 각 정당이 내세운 후보 프로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선거였다면 더 꼼꼼하게 봤겠지만, 나의 최선은 거기까지 였다. 자민당(VVD)과 기민당(CDA), D66, 노동당(PvdA), 녹색좌파당(Groenlinks)과 기독인연합당(ChristenUnie), 동물을 위한 당(Partij voor de Dieren), 사회당(SP)을 비교해보고 마음을 정했다. 눈에 띄는 것은, 하나 이상의 정당이 공통적으로 도시가스 필요없는 동네를 만들기 위해 에너지 그리드를 새로 짜는 장기 에너지 전환 계획을 공약집에서 언급하고 있던 점이었다. 또 대학(WO)이나 전문대학(고등직업교육; HBO)을 가지 않는 대다수의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보통직업교육학교(MBO) 지원 예산과 지역 일자리 연계 프로그램에 더 신경쓰겠다는 공약도 특히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투표소까지는 마침 200미터. 투표는 투표소 입장부터 퇴장까지 5분 남짓, 금방 끝났다. 다음날 확정된 투표결과를 확인했다. 내가 사는 곳은 D66이 9석, 녹색좌파당이 8석, 자민당이 6석, 노동당이 4석, 기민당이 3석, 동물을 위한 당이 3석, 사회당이 3석, 기독인연합당이 1석, 지역에만 있는 지역 정당이 2석을 얻었다. 총 39석이었다. 나는 지역의회에 도시공간과 계층 간 양극화에 목소리를 낼 정당이 있기를 바랬기 때문에 공약집에 양극화란 단어를 언급한 정당, 왠지 이번에 표가 줄 것 같으나 의회 내 존재감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정당에 투표했다. 결과를 보니, 그나마 어느 정도 의석수를 유지하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석수가 좀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정당은 과연 줄었고, 목소리가 커졌으면 바랬던 정당은 과연 지난 선거 대비 의석수가 2배로 커져서 예상 외 가장 큰 도약을 했다. 내가 표를 던질 수 있는 정당은 비롯 하나라도, 이렇게 균형잡힌 의회를 보니 서로 견제도 하고, 각 정당 별로 지지기반을 의식해 일자리면 일자리, 에너지 전환이면 에너지 전환, 중산층 임대 공급이면 임대 공급 등 중점 분야의 예산과 프로그램을 잘 챙기겠다는 생각이 드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일전에 속한 연구소 연구원 몇 분께 지방선거 표를 어느 정당에 던질건지 여쭌 적이 있다. 난 이런 질문이 대화의 소재가 된다고 생각했고 진심 궁금하여 거리낌 없이 던졌다. 질문 받으신 분들이 조금 당황해서 내가 더 당황했지만 말이다. (그 후로는 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가급적 투표 성향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은 삼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묻기를 잘 한 게, 학문적으로 존경하던 한 분의 대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정당 성향도 중요하지만 지방정부 예산과 정책의 경우 낭비없이 제대로 쓰이는지,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정책을 펼치는지, 합당하게 예산을 지출하는지 봐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 투표할 거라고 하셨다. 해당 도시에 오래 살며 아이들도 키웠기 때문에, 학부모 위원회와 이런 저런 동호회, 협회 등 지인과 네트워크가 있고, 마침 정당 후보 중에 자신이 잘 아는, 일 잘하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에게 투표할 거라 하셨다. 듣고 보니 그 교수님의 말도 참 일리가 있었다.
지역을 사랑하고 지역에 뜻있는 일꾼이 지방정부의 예결산을 감사하고, 정책 수립을 요구하는 정치인이 되려면 아무래도 우리나라 소선거구제 다수대표제보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더 낫겠다 싶다. 오히려 여러 정당이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나눠서 의회 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거대 양당의 공천에 목매는 문화는 약해지고, 각 정당 별로 진짜 '일다운 일'을 할 사람을 뽑는데 매진하여 의회 내 견제와 비판이 더 활발해 질 것을 기대한다. 당연히 정당의 공천은 중요하고, 비례대표 후보 선정 절차와 순위 확정 절차가 각 정당 별로 납득가능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정당은 도태될 것이다.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일 못하는 정당에 남아있기 힘들 것이다. 지역 주민들도 정당이 내세운 공약뿐 아니라 후보 면면을 보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이상한 인물을 명부에 내세우면 그 정당 신뢰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곳도 정치에 대한 냉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방의회 선거율은 1978년 74% 최고치를 경험한 이후, 계속 낮아져서 2014년에는 54%까지 떨어졌다 (출처: 네덜란드 행정 신문). 지난 2018년 3월 지방의회 선거는 55%로 2014년 선거보다는 좀 더 높아졌다고 한다. 낮아지는 지방선거 참여율이 바로 내가 스포티파이로 들은 공익광고처럼 대대적인 선거 참여 캠패인을 정부 차원에서 벌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것, 우려할 상황이다. 그에 반해 하원 선거 투표율은 1998년 73%가 역대 최저치였다. 역대 최고치는 1977년 88%였고, 작년 2017년 선거는 81.9%를 기록했다 (출처: 네덜란드 의회정치기록센터). 심지어 네덜란드 투표일은 공휴일도 아니다. 지방의회, 국회 선거를 막론하고, 출퇴근 전후로 투표해야 한다.
2018년 3월 네덜란드 국책연구소인 사회문화정책연구소(SCP)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회에 관한 신뢰와 네덜란드 사회 발전에 대한 기대, 네덜란드 경제 상황 개선에 관한 기대가 최근 모두 가파르게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흥미로운 점은 2017년 북홀란드(Noord-Holland) 도지사(Commissaris van de Koning)가 '의회 체제의 미래'에 관한 중간 연구 발표회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정치인은 믿지 않아도, 정치는 믿고 있습니다.(We hebben wel vertrouwen in de politiek, maar niet in onze politici.)"라고 발언했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한계가 커도, 정치 체제 자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의 범위와 타락의 정도를 제약하면서 정치효능감, 즉 나의 정치 참여가 뭔가 영향력을 발휘할 거란 믿음을 주는 데 여전히 기여하고 있다는, 그런 말로 들린다. 선거 제도는 정치 체제의 핵심 축이다.
우리나라는 2018년 6.13 지방선거 투표율이 60.2%였고, 23년만에 최고치를 돌파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 투표율은 우려할 상황이다. 1948년 제헌국회 투표율이 95.5%를 기록한 건 아득한 전설이다. 2016년 20대 국회 선거는 투표율이 58%였다. 이는 역대 최저치 2008년 18대 국회 선거 46.1%보다는 많이 올라온 수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 15대 국회 선거 투표율이 처음으로 70%대 아래인 63.9%를 기록한 이래로, 한번도 70%를 넘어본 적이 없다. 네덜란드 하원 선거의 역대 최저 투표율이 73%라는 점이 경이롭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총선 투표율이 70%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의와 상반되게 돌아가는 국회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이 커서, 지역구 별로 1등만 국회에 보내는 선거제도 하에서 맘에 안 드는 후보도 울며 겨자먹기로 그나마 뽑아야 하는 상황이 짜증나서, 내가 투표하든 안 하든 어쨌든 두 정당 중에 한 명이 될 테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냉소가 커서 그런 건 아닐까? 어차피 들리나 마나 상관없는 소리로 대우하니까, 소리를 아예 안 내기로 한 건 아닐까? 한 마디로, 사표가 많아서가 아닐까?
정치 체제에 관한 신뢰, 정치적 효능감, '내 한 표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혁은 꼭 이뤄져야 한다. 거대 양당이 의사결정력을 나눠갖기 쉬운 선거제도가 아니라, '민의의 대변'이라는 본래 취지를 살리는 선거제도여야 산다. 공공성을 회복한 선거제도는 그 자체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유산, 무형의 공적 재산, 곧 공공재(public goods; a public good is a product that one individual can benefit from without reducing its availability to another individual, and from which no one is excluded)이다. 2020년 21대 국회 선거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편을 내세우고, 개헌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정당들이 국회 과반을 차지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다음 세대에는 정치에 대한 냉소가 아닌, 정치효능감을 물려주고 싶다. 정치인은 믿기 어려워도 정치는 믿을 수 있게 체제를 개편하는 과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믿을만한 정치인이 믿기 어려운 정치인보다 더 쉽게 선출되려면, 정당 정치가 더 건강해지려면, 믿을 만한 정치인을 지금보다 더 잘 키우고 지켜낼 수 있으려면 말이다.
또 더욱 성숙한 시민의식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기껏 말했더니 내 목소리, 듣지도 않네'가 아니라, '아,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잘 들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제대로된 목소리를 내 보려 자세를 바로 잡게 된다. 이처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표를 한 표답게 대우해야 국민도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할 것이다.
어느 투표 독려 광고보다도 투표에 대한 동기 부여를 높이는 길은 표의 등가성을 높여 사표를 줄이고 정치효능감을 높이는 선거제도, 곧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개혁이다.
참고 자료: 이 글을 발행하고 나서, '네덜란드의 선거제도' 포스팅을 발견했다. 학계 용어로 더 정확하고 일목 요연하게 정리했기에 강추한다. 레이던대 정당기록연구소(Parlementair Documentatie Centrum)가 운영하는 '정당 & 정치' 누리집에서 확인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다만, 한 가지 오류가 있다. 그 글에서는 '선거구'라 칭하는데, 적절한 번역이 아니며, '선거 운영 단위'가 더 정확하다. 원어에서 선거구는 kiestdistrict(선출 단위) 또는 stemdistrict(선거 단위)라 하고, 그 글에서 설명하는 개념은 '선거 운영 단위'로서 kieskring으로 부른다. '소선거구제(districtenstelsel)'를 떠오르게 하는 선거구(kiesdistrict)와 엄연히 다는 다른 행정 개념이다. 즉, '네덜란드의 선거제도'란 포스팅에서 20개의 '선거구'는 (선관위를 조직해 선거를 준비, 개최, 운영하는 단위란 의미에서) '선거 운영 단위'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네덜란드 국회 선거구(kiesdistrict)는 전국구, 하나이다. (근거: www.parlement.com/id/vh8lnhrp1wzz/kieskringen)
- 100년 역사의 네덜란드 선거위원회 www.kiesraad.nl - 4년마다 임명되는 7인으로 구성, 평소 선거권과 선거법에 관한 지식을 알리며, 선거 때는 선거관리위원회로서 기능.
- 1917년의 일괄 타결(de Pacificatie van 1917)과 1918년 헌법 개정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칼럼 - www.rd.nl/opinie/grondwetsherziening-van-1917-verdient-herdenking-1.1450791
- 반혁명당(ARP; 1879-1980)은 현 기민당(CDA)의 전신, 즉 1980년 기민당으로 통합한 3대 기독정당 중 하나이다. 건전 보수였다. 교육과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아 당시 대중 계몽과 동원에 선두적인 조직력을 보였고, '네덜란드어를 쓰는 민족'이란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 전통의 계승, 발전을 강조했으며, 가정 단위의 공동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 질서와 노사 제도 수립을 중요하게 여겨 대중, 즉 보통 노동자의 휴식할 권리와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들을 옹호했고, 동호회 및 각종 협회, 재단 등 자발적 결사의 자유와 조직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 또한 일찍부터 중앙집권화와 관료주의 확대보다는 지방분권과 사회 각 조직의 유기적이고 자율적인 연대를 강조했다. 그래서 어찌보면 전국에 펼쳐진 교회 조직과 연계하여 소선거구제 하에서 최다득표수를 얻기가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했던 기독 계열 정당들이 특수교육지원법 통과를 조건으로 비례대표제 도입에 응한 점은 기득권 보호의 논리보다 폭넓은 공익 추구를 더 우위에 두었던 당시 정당 지도자들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보인다. 네덜란드란 국가와 사회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기여할 선거제도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비례대표제 도입 논리를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당수(1907-1920)였고, 총리(1901-1905)도 앞서 역임했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정치 사상과 정당 강령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 강령(새물결플러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당시 헌법 개정을 주도했던 정치인은 총리(1913-1918)이자 내무부 장관 Cort van der Linden으로, 자유주의연합(Liberalen Unie)의 당수였다. 이 때의 자유주의는 진보로서 황금기였다. 이를 계승하는 정당이 지금 자민당(VVD)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자민당은 부동산소유자와 대기업의 이해를 옹호하는 반면, 당시의 자유주의는 불로소득과 근로소득의 차이를 더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고, 토지에서부터 발생하는 이익은 독점력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기업가정신을 발휘하여 창출한 사업소득 및 근로소득과는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수도 및 전기 등의 공공재 및 철도와 같이 국가 경제 발전에 필요한 기본 기반시설을 공영으로 공급해야 하며, 네트워크 소유권에 기반한 이익 추구 등 독점 또는 과점에 기반한 지대추구는 근절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경제 정책을 펼쳤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관한 설명: 2018년 기사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74728, 2016년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605071857001, 2014년 기사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64754.html, 참고하기 조심스럽지만 설명이 유용한 나무위키 https://bit.ly/2LPTfAX.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관한 우리말 설명:
https://youtu.be/wd43b3RgzmQ 쉽고 상쾌하다!
2018년 6월 한국, 3월 네덜란드 지방의회 선거 결과를 비교, 생각해 보게 하는 영상:
https://youtu.be/P1EIS4P7zWM 쏠림이 얼마나 심각한지 생생히 보여준다! 다른 의회를 꿈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