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지방선거와 투표 - 비례대표제
1. 아카펠라
2. stem(de): 표는 곧 목소리
3. 거짓 없는 광고, 자신 있는 투표 독려
4. 네덜란드 비례대표제에 관한 몇 가지 사실과 숫자
5. 지방선거, 투표와 결과
6. 덧: stem 파생 단어와 표현
3월 초였다. 최저기온은 영하 4도까지 내려가고 최고온도라야 영상 5-7도, 게다가 바람과 비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 낮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이미 올라온 꽃들도 다시 얼어서 미처 다 못 피고 시들 것 같았다. '대체 언제 날씨가 풀린단 말인가!' 생각하며 기차를 타고 가는 데, 스포티파이(Spotify)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유투브는 핸드폰 화면이 꺼지거나 디른 앱을 사용할 때 영상과 함께 음악도 멈춰버리니 불편하다. 스포티파이로는 지정한 음악가의 곡을 이동 중에도 계속 들을 수 있다. 단, 음악을 30분 들을 때마다 광고도 같이 들어야 한다. 광고 없이 재생 목록과 순서까지 내가 지정하려면 프리미엄 서비스를 사야 한다. 광고에 잠시 귀를 빌려 주는 대신 이 정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창 밖에 시선을 두고 멍 때리면 까페 배경 소음처럼 광고음도 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시끄러운 광고라면 이어폰을 빼거나 소리를 낮춘다. 어느 편이든 시간은 흐르고, 반가운 선율이 다시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날 광고는 달랐다.
잘 듣지 않으면 또 한 편의 새 곡인 줄 알았을 음악.
귀를 사로잡은 아카펠라!
https://youtu.be/X3nRG4KlRXg (27초 영상)
De verkiezingen komen eraan.
Maar waarom is jouw stem zo belangrijk?
Zie ons land als een koor.
Iedere stem draagt iets bij.
Nederland werkt het best wanneer we allemaal worden gehoord!
Want elke stem telt!
The election is coming!
But, why is your vote so important?
See our country as a choir.
Each vote contributes something.
The Netherlands works the best when all of us are heard.
Because each vote counts.
선거가 다가오네요.
하지만 , 당신의 한 표(목소리)가 왜 그리 중요한 것일까요?
우리나라를 합창단이라고 해 보죠.
표(목소리)마다 뭔가 기여한답니다.
네덜란드는 우리의 목소리가 모두 다 들릴 때 가장 잘 돌아가요.
왜냐하면 각자의 표(목소리)를 모두 다 반영하니까요.**
의역 ** 왜냐하면 각 표를 모두 다 세니까요. / 각 표를 모두 계산에 포함하니까요./ 각 표를 의석 수에 모두 반영하니까요.
그렇다. 그 광고는 지방선거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공익광고 였다. 3월 21일 수요일이 지방선거일이었다. 3월 초에 이미 곳곳에 동네 길가와 기차역 주위로 점점 정당 홍보 포스터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딴 생각하느라 첫 문장은 놓쳤지만, waarom is jouw stem zo belangrijk이 들리는 순간, 직감했다. '아, 선거 참여하라는 공익광고구나.' 그리고 이어 아카펠라가 나올 때, 그 직감이 틀리지 않은 줄을 확인했다.
왜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공익광고가 아카펠라를 모티브로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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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곧 목소리이다.
네덜란드어에서 목소리와 표는 동음어이다. 선거 제도가 생겨나면서부터, '목소리'라는 뜻을 가진 stem에 '표'라는 뜻이 이차적으로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 stem(de)은 소리나 소음을 뜻하는 geluid(het)와는 구분된다. 의미없는 그냥 소리는 geluid(het), 시끄러운 소리인 소음은 lawaai(de)지만, 의미를 지닌 소리나 식별가능한 소리, 사람의 목소리는 stem이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모두 또렷하게 들리는 아카펠라.
각 사람의 목소리가 개성있게 들리지만,
또 그 모든 목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져 귀를 즐겁게 하는 마법.
악기 없이 사람 목소리들만으로도 아름답고 풍성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아카펠라.
'한 사람, 한 사람이 투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려고,
아카펠라라는 비유를 들고 오다니.
과장은 아니네.'
광고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는 피식 웃었다.
자신있는 투표 독려 광고였다.
왜냐고? 광고에는 과장과 거짓을 섞기 마련이라지만,
네덜란드 선거 제도는 실제로 '모든 표'를 계산에 넣는다.
합창단에 비유하자면, 실제로 모든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셈이다.
어떻게 그렇냐고?
바로 100% 비례대표제 덕분이다.
단일선거구 개방형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더 자세한 설명과 연동형 비례대표제와의 차이는 다음 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당선권 안에 있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는 이상, 내가 던진 표가 지방의회 의석으로 대표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예를 들어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기초의회 (구의원) 선출을 놓고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나누는 데 대해 논란이 있었다. (참고기사 시사인: 기초의회 쪼개기에 속타는 소수정당) 2인 선거구에서는 득표수대로 후보 중 2위까지 의원이 되고, 4인 선거구에서는 득표수대로 후보 중 4위까지 의원이 된다. 내가 만약 지지하는 의원이 2위 안에 못 들거나, 4인 안에 못 들면 내가 던진 표는 구체적인 효력없이, 그저 '득표율 ~%'에 보탰다는 기록만 남기고 사라지는 셈이다. 즉, 2인 선거구는 4인 선거구보다 주류 정당이 아닌 타 정당을 지지하는 의사가 의석수로 의회 내에 반영될 가능성을 줄여버린다. 계산을 해보자. 4인 선거구에서 만약 후보 중 득표수대로 4명까지 의원으로 당선시키고, 그 4명의 득표율이 합산해서 70%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나머지는 사표(죽은 표)이다. 2인 선거구에서 득표수대로 2명까지 의원으로 당선시키고, 그 2명의 득표율이 합산해서 55%였다라고 하면, 나머지는 모두 사표가 된다. 그만큼의 목소리가 의회에서 사라진다.
네덜란드에서는 의회 선거 시, 그 의회가 관할하는 지역 전체를 하나의 선거구로 확정하고, 그 안에서 정당 별 득표율 대로 의석수를 나눈다. 무소속 후보는 없다. 대신, 정당에서 정한 후보 당선 순번, 즉 비례대표 순위를 보고 후보 각 개인에 대한 선호도 표시할 수 있다. 이를 voorkeurstemmen(선호 투표)라 한다. 개인 표를 일정 기준 이상 많이 받는 후보는 그만큼 당이 정한 당선 순번을 어느 정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정당명부지만, 후보 당선 순위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의미에서 개방명부식 투표라고 부른다.
정당명부 100% 비례대표이면, 사표가 거의 없다. 내가 투표한 정당이 '총 득표수를 총 의석수대로 나눈 비율', 즉 '의석 하나를 차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투표 수'를 얻지 못했다면, 사표가 된다. 그러나 그 최소 투표 수를 넘기만 하면, 의회 내에서 최소 의석 하나 이상은 차지할 수 있다. 물론, 조그만한 지지를 받는 정당, 득표율이 낮은 정당이면 의회 내 의석 수도 그만큼 적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법안을 심의하고 통과시킬 때, 정부 예결산을 감사하고 승인할 때, 의회 내 발언권은 행사할 수 있다. 토론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예를 들어, 25%의 지지율을 받은 정당이 의회 내에서는 40%의 의석수를 얻게 되기도 하고, 7%의 지지율을 받은 정당은 1%의 의석수를 얻게 되기도 한다. 득표율과 의석수 간의 비례성이 낮다. 목소리가 머리수만큼 골고루 들리지 않을 뿐더러, 큰 목소리가 작은 목소리를 덮어버리거나, 머리수가 적다고 아예 목소리(마이크)를 빼앗아가기도 하는 셈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왜 중요하나고요?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으니까요.'
이렇게 자신있는 광고라니.
아카펠라는 그래서 적절하기 이를 데 없는, 듣기 좋은 공익 광고였다.
커버 및 위 이미지 출처: 2018년 선거 공익광고 www.rijksoverheid.nl/documenten/publicaties/2017/11/08/toolkit-gemeenteraadsverkiezingen-en-raadgevend-referendum-2018. 2018년 선거 투표 독려 캠페인 효과 평가보고서, 선거 운영 평가보고서. 선거 관련 상시 정부 포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