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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순 Feb 22. 2022

최진영, 내가 되는 꿈

책을 잊지 않기 위한 필사


최진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구의 증명을 통해 최진영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에 이번 책에도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앞으로의 난 이 책을 읽기 전과 같은 내가 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최진영의 책을 읽으면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최진영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내뱉는 모든 말들이 나를 관통해 지나간다. 분명 나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이런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었는데 왜 내 이야기가 여기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너무 적나라해서 창피함이 몰려온다. 편협한 나의 시선과, 세상을 향한 원망, 구체적으로 비관적이고 허무맹랑하게 긍정적인 생각, 맞으면서 아닌척하는 비겁함, 아니면서 맞는 척하는 찌질함 이 모든 게 뒤엉킨 내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 같다. 무시할 수도 없이 뾰족하게 다가오는 이 장면들이 나를 관통하고 나면 이상하게 후련하기도 하다. 구질구질하게 엉켜있는 내 생각들이 알아듣게 잘 나열되어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속상하고, 슬프고, 아프고, 따갑고, 후련하고, 통쾌하다.



소설에 대해 구체적이게 쓰고 싶은데 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기억이 나는데 뭐라고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이건 꼭 오래 담아두어야 해'라고 생각하며 접은 토끼 귀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이번 필사도 역시 조금 많이 길어질 것 같다.






page. 11


할머니는 대부분 날들 건강했고 노환은 서서히 찾아왔다. 늙으면 죽는다. 모두 알고 있잖아. 그렇다 해도 '할머니가 죽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산 하나를 옮기는 일과 비슷했다. 산을 절반도 옮기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떠났다. 남아 있는 절반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종종 떠올렸다.


지금은 맑다.


엄마는 '맑다'는 단어를 귀중하게 간직했지. 나는 '지금'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지금은 금방 사라지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건 할머니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 사라지는 지금 속에 아직 있다는 것.


아직 있다.


그럼 할머니는?


이제 없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사라진 할머니가 어딘가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 어딘가에도 '지금'이 있길 바랐다. 할머니는 천국을 믿었다. 천국은 영원한 곳. 다시 죽지 않는 곳. 고통도 슬픔도 의심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도 '지금'이 가능한가. 나는 수시로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출퇴근을 할 때도 밤 깊어 잠들기 전에도 박수원이 이기죽거릴 때도 김선우가 궤변을 늘어놓을 때도 천국을 상상했다. 나쁜 생각이나 부질없는 싸움에 빠져들지 않으려는 방법이었고······스스로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page. 14


뒤늦게 손쓸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냉장고나 책상 정리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 했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고 씻고 누워 비극적인 상상과 나쁜 원망에 빠져드는 삶. 그게 바로 나의 하루였다. 이 순간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나의 조각들이 나를 완전히 부러트리기 위해 눈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 순간만 견디면 결국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이 순간을 견디기 위해 내가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를 원망하며 결국 끝은 괜찮아질 거라는 허무맹랑한 낙관을 품고 살면서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꽤 괜찮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고 포장하며 살아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말이 너무 창피하다.




page. 20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나.


기분이 바닥을 칠 때마다 나를 가격하는 생각.


왜 이런 사람이 되었나.




page. 20


아빠는 죽었고 장례식장에서 나는 계속 화를 냈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고 죽음은 처음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누군데 여기와서 울고 난리야? 그때 내 눈에는 모두 위선적으로 보였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해야 하는 거니까 그런 척을 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울고 슬퍼하는 사람이 싫었다. 울지마, 울지 말라고. 아빠가 죽었다는 걸 그렇게 티 내지 말라고. 사람이 죽었다는 걸 어떻게 금방 받아들이지? 멀쩡하던 사람이 반나절만에 죽었는데 어떻게 바로 믿을 수가 있어? 기다렸다는 듯 검은 옷을 입고 와서 슬픈 얼굴로 앉아 소주를 마실 수가 있어?


···


나는 제대로 울지 않았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 나의 울음이 아빠를 완전히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게 힘을 줬다. 그때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른의 일이었다. 죽음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사람들. 죽음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어렴풋이 경험한 사람들의 일. 이제 그들의 나이가 되어서 나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 남긴 2백만 원 얘기를 들으면서.




page. 21


내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하는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내가 하는 거고.


나를 맡아 보살피던 어느 날엔가 할머니가 무심히 꺼낸 말.


언젠가는 네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할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네가 할 거고, 그런 거다. 사는 게. 지금이 영영일 것 같지만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고.


가스 불 위에 올려 둔 냄비에 된장을 한 숟가락 풀면서 할머니는 중얼거렸다. 나를 달래려는 말도 아니었고 가르치려는 말도 아니었다. 기도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 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는 게 다 병이지.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다 보면 체기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답답하다. 죄책감, 모욕감, 민망함 등등 좋은 감정들 보다 부정적이고 날 할퀴는 감정들이 더 많이 쌓인다. 모든 시간을 안고 살아가기엔 난 너무 나약하다.




page. 50


순지와 화해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야속한 마음이 너무 컸다. 우리는 더 즐겁고 신나게 지낼 수 있었다. 담임이 순지를 때리지만 않았다면 땅따먹기를 1000번도 넘게 했을 거다. 뽀뽀는 그보다 더 많이 했을 거다. 마지막 날에야 하는 화해는 우습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 아니었다면 순지가 내 말에 대꾸했을까? 나도 모르게 갑자기 사과할 수 있었을까?


공룡은 찾지 못했다. 조금 울었다.


담임에게 모욕감을 줬는지는 모르겠다. 흉터를 더 큰 흉터로 가린 것만 같았다.




page. 52


엄마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 정도 후회는 매일 하고 살아요. 후회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고요.




page. 53


아빠를 보면서 만들어 낸 나만의 이론이 있다. 지금부터 나의 '지름길론'을 짧게 말해 보겠다.


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 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아빠에게는 내게 들일 시간과 정성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름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대신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나를 생각하는 지름길. 내가 그 틀을 벗어나면 '네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라고 말하면서 틀을 벗어난 나를 비정상으로 잘라 버리는 거다. 아빠가 생각하는 틀 안의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 아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골치가 아플 테니까. 자기 일이나 존재 말고 '자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니까. 아빠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자식'이란 믿음을 선택했고 내가 그 믿음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자기 믿음을 의심하는 대신 나를 탓했다. 놀랍도록 편한 방식이지.




page. 57


나는 어른들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알고 있다.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말이다.


더는 같은 집에서 살 수가 없었던 거다. 외박을 하고 각방을 쓰더라도 같이 사는 건 같이 사는 것. 가구와 생활용품과 공기와 공간과 냄새를 공유하는 것. 상대의 흔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 엄마와 아빠는 그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부산과 경기도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나를 딱 중간에 뒀다. 마치 시소 받침처럼. '같이 살고 싶지 않다'와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가 다르지 않나?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두 문장 중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나와 같이 살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 내겐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은 당시 엄마와 아빠 그 둘 사이에 생겼던 수많은 일들과 감정들을 이해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이건 지금이라 가능한 거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엔 백만 가지 이유는 다 필요 없었고 결국 내가 맞이했던 당시의 상황이나 그 상황으로 느꼈던 내 심정, 그러니까 어쩌면 버려진 것 같은 그 마음만이 느꼈졌던 거다. 하지만 버려졌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걸 엄마나 아빠가 알게 되면 속상해했을 테고 난 엄마와 아빠가 속상한 마음이 드는 걸 원치 않았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괜찮은 척했다. 그 괜찮은 척이 결국엔 진짜 괜찮음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종종 느껴지는 외로움과 동떨어진 마음이 들 때면 괜찮아진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난 이제 엄마와 아빠 모두의 마음을 알고 있고,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 수 없다.




page. 69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라-티벳에서의 7년'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라질 것 같던 낙엽과 꽃잎과 은박 종이는 편지지에 적힌 구체적이고 장황한 글자보다 그 시절의 감정과 햇살을 더욱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page. 70


나는 요즘 만사 짜증 나고 귀찮고 다 망했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렇다고 뭔가를 새로 시작할 자신도 없습니다. 어릴 때 나는 그런 어른들을 알았어요. 참을성도 배려도 없이 화부터 내는 어른들 말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끔찍합니다. 중요한 건······ 큰 고통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미루고만 있어요. 알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한다고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란 사실을. 어질러진 방을 내 손으로 치우고 나는 다시 방을 어지르겠죠. 먼지는 쌓이고 벽지는 낡아가고 어딘가에서 계속 나쁜 냄새가 올라오겠죠. 나는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겠죠. 이 권태와 환멸, 손쓸 수 없다는 우울과 허무, 계속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은 대체 어디에서 흘러오는 겁니까.




page. 90


아무튼 모욕적인 순간은 많았다. 어떤 일을 겪고 한참 지난 뒤에야 그때 내가 느껴야 했던 건 부끄러운도 자책도 아닌 모욕감이었다고 되짚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모욕감은 남한테서만 받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나를 모욕하는 순간도 있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page. 92


겨울방학 동안 담임을 만나지 않으면서 복잡한 감정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나는 나를 경멸하게 되었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를 연기하며 내가 나를 모욕했으니까. 담임은 나의 수많은 편지를 어떻게 했을까. 설마 간직하고 있을까? 아, 제발 모두 불태워 버렸길. 담임에게 쓴 유치한 편지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싫어서 미쳐 버릴 것 같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과거의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편지는 위험한 거야.


책상에 늘어놓은 펴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음을 글자로 전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수의 편지를 사랑한다.




page. 97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았다. 내가 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 나의 미래는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모르겠다는 말은 지겹다.


···


내가 여기서 잘 버티면 너는 그곳에서 평안할까. 네가 거기 잘 있다고 상상하면 이곳의 나는 조금 용기가 난다.


···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과거가 아깝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미래의 내가 이 편지를 아주 우습게 여기기를 바랄 뿐이다.



어릴 적 내가 상상하고, 되고 싶었던 어른의 모습은 아주 분명했다. 지금도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은 아주 분명하다. 이 분명함은 나를 더 허무하게 만든다. 왜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나, 나는 이만큼 살아왔는데 왜 아직 내가 원하는 그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 건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틀림없이 좌절하게 된다. 1분 전만 해도 '나 이런 사람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활기차게 다짐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정말이지 왜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는 걸까. 나는 나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왜 나로 태어난 걸까. 왜 나에겐 아무런 선택지가 없는 건가. 결국 난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살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날 장악하게 되면 그냥 눈을 감고 내 상상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 비갑한 이 행위가 결국 날 죽이겠지만.




page. 114


당장 내일부터 돈을 벌어야지. 그래서 이모의 화장품을 물어 주고 훨씬 더 비싼 옷과 핸드백을 사 줘야지. 그리고 이 집을 탈출해야지. 엄마 집에 내가 들어갈 공간이 있을까? 엄마 집도 남의 집인가? 엄마 물건도 남의 물건? 어쨌든 이 집을 떠날 거야. 거지가 되더라도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나는 영영 사라질 거야.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게 할 거야.


···


울지 않기 위해서 나는 '세계 탄생의 비밀'을 떠올렸다. 예전에 지금처럼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던 때 했던 상상. 이 세계의 중심에는 지옥이 있다. 세계는 씨앗처럼 지옥을 품고 있으며 그 씨앗에서 세계는 탄생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건, 잠에서 깰 때마다 우는 건 지옥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말을 못 하는 것도 지옥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옥의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니까.




page. 124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외갓집으로 이사 오고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 종종 하는 질문. 어떤 그림에서 나란 사람을 오려 낸 다음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 가도록 내버려 둔 것 같았다. 난데없는 곳에 뚝 떨어진 나는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어디지, 난 왜 여기 있지, 원래 난 어디에 있었더라, 당황하는 것이다. 나는 늘 어딘가로 가는 도중 같았고, 어디에도 나만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대체로 내가 굉장히 쓸모없다거나 사람과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다고 느껴지면 내 주위로 그물이 쳐지듯 그런 생각이 내려왔다.




page. 126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거나 쓸모없는 것이 내겐 가장 소중한 것. 그런 것에는 나의 슬픔이 묻어 있다.




page. 131


안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어둠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 분쇄되는 것만 같았다.


사전에 정의된 '마음'은 내가 생각하던 의미와 비슷했지만 아주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마음'이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걸까?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같은 글자로 쓰는 거지. 각자 다른 의미를 최대한 가까이 이어 보려고 계속 쓰고 말하는 거지. 그런데 어른들은 때로 내게 그 정도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page. 132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일찌감치 죽었으면 좋았을 거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죽은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안타까워할 거다.


아픔이 뭔지도 모르는 천사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죽었다.


천사가 죽었을 때는 그렇게 슬퍼했으면서 살아있는 나를 버렸다.


영혼에게 공간은 필요 없다. 천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훨씬 넓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겨우 인간인 주제에 슬프다고 울었다.


내가 있는데 왜 그렇게 불행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의 어두운 방에서 나는 나의 빛을 뽐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엄마가 있었지만 불행했다.


불행하다고 말하면 불행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불행하지도 않다.


불행은 불쌍하다. 행복은 잔인하다.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어.




page. 138


10년 후, 20년 후를 걱정하면 당장 불행했고 더 나은 삶은 헛된 꿈 같았다. 최악은, 걱정이 커질수록 의욕은 더욱 생기지 않는다는 것. 다른 집을 구해보려고 행동하지 않았고 새로운 일을 배우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불안이 밀려오면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


그게 나의 최선이자 최악이었다. 비난받지 않기 위해 쫓기듯 일하면서 내가 나를 제일 먼저 비난하는 삶.




page. 139


예상했던 말들이 박수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나이와 경력으로는 더 나은 직장을 구할 수 없을 거란 저주, 책임감과 직업의식에 대한 연설, 남의 돈 받고 일하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 박수원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어딜 가나 비슷하다면 꼭 이곳이어야 할 이유도 없겠지.




page. 156


서운해?


엄마가 물었다.


아니.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해도 돼.


아니야.


···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런 거 없어.


화나면 화난다고 얘기하고,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얘기하고.


엄마는 그래?


응?


엄마는 할머니한테 다 말해?


그렇진 않지.


그럼 엄마는 나한테 다 말해?


엄마는 어른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엄마가 미안해서 그러지.


그럼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미안해.


알았어.


이것 봐.


뭐가.


미안하다고 말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


그건,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이 달라져야지.


······우리 딸이 점점 똑똑해지네.


떨어져 있을수록 변화를 더 크게 느끼는 거야.


방학하면 엄마한테 올래?


몰라. 보고.




page. 165


운동장에 비가 내리면 흙이 젖고 도로에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가 식는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될 뿐이다. 무수한 물방울이 거대한 물에 합쳐질 뿐이다. 대체 무슨 소용이지?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


살면서 봤던 찬란하고 눈부신 것들은 모두 환상 같았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고함을 집어던져서 눈앞의 풍경을 깨트리고 싶었다. 깨트릴 수 없다면 금이라도 내고 싶었다. 금을 향해 내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내 안에 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 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 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가방에 국어사전이 있었다면 '허무'라는 단어를 찾아봤을 거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과 '허무'가 딱 들어맞는 단어인지 확인해 봤을 거다.




page. 167


코를 풀면서 이모가 말했다. 나도 정말 몰랐다. 이별이란 이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란 걸. 이별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 아닌가? 엄마와 아빠는 아직도 이별 중일까? 벌써 이별했을까? 남과 남이 만나서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다시 남과 남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별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겠지만······ 완전히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젖은 채로 바람을 맞으니 추웠다.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바라보고도 싶었다. 물이 물이 되는 정직하고도 허무한 광경을. 분노의 춤을 추는 비 내리는 바다를. 정국이와 만나는 동안 행복해하던 이모를 떠올렸다. 할머니의 못된 말에도 꿈쩍 않던 이모를 이제는 볼 수 없는 걸까. 하지만 행복해본 이모는 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모는 정국이와 하나의 우산을 쓰고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 봤으니까. 이렇게 휘몰아치는 하루를 경험한 이모와 경험하지 않은 이모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으니까.




page. 170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방에서 똑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잠들겠지. 비 내리는 바다를 봤고 사실을 확인한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잠들 것이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섞인다고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page. 184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잃었다, 다 잃었다고 생각했다. 짙은 우울이 방 안 가득 고였다.




page. 190


어린 내게 젊음은 완벽한 어른이었다. 지금 내게 젊음은 얼어붙은 호수 같은 것. 언제 갈라지고 깨질지 알 수 없는 것. 미끄러지지 않으면 얼어붙는다. 서로에게 적당한 속도로 다가갈 수도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다.


···


빙판에서 우리는 영원할 수 없다. 어릴 적 내게 빙판은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이었다. 어른들은 빙판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빙판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언 것은 녹는다. 인식은 변한다. 시간은 쌓인다.




page. 204


나는 친구란 뭘까 생각했다.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기억을 만들었나. 같이 있으면 재밌었고 질투했고 외로웠고 때로는 지겨웠고, 친하니까 더욱 비밀을 감췄던 우리들. 미지가 자조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에도 '그래도 넌 인기도 많고 예쁘잖아'라고 생각하면서 미지보다 더 불행한 이류를 찾으려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


나 말고는 전부 화목한 집에서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 부모님은 싸우지도 않고, 텔레비전에서 숱하게 본 다정한 가족처럼, 아빠 엄마 아들 딸로 구성된 가족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 거라고. 나는 '가족의 표준'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책에서 봤고 학교에서 배웠다.


···


나는 그런 가족이 정답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정말 그렇게 사는 가족은 아주 희귀할지도 모른다. 다들 그렇게 살지는 않으면서 그렇게 사는 척하는지도.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지도 모르고 더 불행해지는 사람들.




page. 210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 남들은 절대 알지 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중요한 말일수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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