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끊고, 6일간의 기록
“당분간은 커피와 술은 드시면 안 돼요.”
“디카페인 커피도 안 돼요?”
“네 디카페인에도 소량의 카페인이 들어 있잖아요. 절대 안 돼요.”
커피를 끊으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술은 어차피 즐기지 않기에 2주 정도는 끊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는? 직장인에게 커피는 그냥 커피가 아니다. 하루를 살게 하는 생명수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한 잔. 출근 후 책상 위 노트북을 키는 동시에 투샷의 아메리카노 한 잔을 탁 마셔줘야 비로소 일 할 맛이 난다. 그런 커피를 무려 2주나 끊으라니, 평소라면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한 귀로 흘리고 몰래 커피를 마셨겠지만, 이번엔 병이 병인 만큼(방광염)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끊어야 한다. 아아, 삶의 낙이 사라진 기분이다.
NO커피 1일 차
출근길, 단골 커피숍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원 샷 커피는 연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님 딱 두 모금 정도만 마신다면? 커피숍으로 들어설 뻔한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사무실로 올라간다. 커피가 없으니 영 잠이 깨지 않는다. 텀블러 한 가득 냉수를 따라 들여 마셔본다. 결론은? 금요일이고 비교적 여유로운 날이어서 망정이지 중요한 업무를 맡았으면 큰일 날 뻔. 하루 종일 비몽사몽 했다.
NO커피 2~3일 차
아침잠을 깨우는 엄마의 커피 드립 향이 야속하다. "한 잔 마셔볼래?" 하는 엄마의 달콤한 유혹에도 이를 악물고 거절한다. 독하다는 말을 들으니 약간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커피의 맛과 향이 그립다. 바삭한 토스트랑 참 잘 어울렸는데 너…이런 바람 부는 날엔 따뜻한 아메리카논데…한 모금만…한 모금만... 커피를 마시지 못해 찾아온 허기짐을 폭식으로 달래 본다.
NO커피 4~5일 차
커피 없는 출근 길이 조금 익숙해졌다. 사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밤에도 잠이 잘 와 아침이 개운한 것도 한몫했다. 매일 3~4천 원씩 지출하던 것이 사라지니 이득인 것도 같다. 하지만 점심 식사 후엔 언제나 잠과의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냉수를 들이켜고, 허벅지를 꼬집는 것도 먹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커피 동냥을 한다. 아, 살겠다.
그리고 드디어 6일 차.
2주 간의 카페인 금지 명령 이후, 약 절반이 지났다. 여전히 아메리카노의 그 구수한(다크 블렌드를 좋아한다) 맛과 은은하고도 묵직한 향, 그리고 정신이 벌쩍 들게 하는 각성 효과가 그립지만 한편으론 매일 같이 마시던, 정확히는 들이붓던 카페인을 멀리함으로써 얻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고등학생 이후 경험해본 적 없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경험. 덕분에 아침도 가뿐한 듯한 기분. 입이 덜 마르고, 왠지 수분 충만 건강한 느낌. 바이럴 광고도 아니고 고작 5일 커피 끊고 오버가 심하다 싶겠지만 성인이 된 이후 쉽게 잠에 들어본 기억이 없기에 개인적으론 놀라운 경험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고 했을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깨어있지 못할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커피가 없이는 하루를, 특히 업무시간을 비몽사몽 한 채로 보낼 것 같았다. 그러면? 당연히 업무 능률이 떨어질 테고 회사에서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덜 깨어 있으면 어떠한가? 하는. 물론 이전보다는 덜 하지만 제 할 일을 다 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 시험 기간에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 위해 수많은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를 때려 부었다. 잠깐의 각성 효과는 몇 달의 불면의 밤 그리고 언제나 깨어있는 그래서 피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으로 되돌아왔다.
최근 시청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헤드스페이스:숙면이 필요할 때>에서는 전구의 발명을 예로 들며, 인공 빛의 등장과 함께 우리의 수면 패턴과 생체 리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분만실의 밝은 불빛을 본 우리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세상일 테지만 생각해보면 인공의 빛이 없던 시절엔 해가 뜨면 밭을 매고, 해가 지면 잠에 드는 소위 내 몸이 원하는, 생체 시간에 맞춰 움직였을 테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겨울철 컴컴한 하늘 아래 몽롱한 정신을 뇌까지 쨍해지는 듯한 밝은 형광등으로 깨우고,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며 일어나라고 스스로를 흔들고 또 흔든다. 물론 전기나 커피 같은 문명의 발전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은 명백하며, 그렇다고 유용한 전기를 버리고, 내가 사랑하는 커피를 뒤로한 채 산속에 들어가 원시의 삶을 살자-라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그러나 정신을 깨우기 위해 한두 잔의 커피를 마시고, 또 마시기에 앞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 몸과 마음도 가끔은 몽롱하고 느긋한 휴식의 시간, '깨어있지 않을 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70% 정도의 깨어남 상태로 적어보는
NO커피 6일 차의 시답잖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