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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얀 Sep 11. 2022

밥벌이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외벌이 5년 차가 돌이켜 본다면

오 년 전, 결혼을 하면서 혼자 돈을 벌어왔다. 지금은 2인가구의 가장이다.


비록 한 군데에 진득하게 붙어있지 못했지만 오 년 동안 꼬박꼬박 직장에 다녔고, 고료를 받지 않고 꾸준히 2년 동안 글을 써 왔다. 그 밥벌이가 나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원래 쉽게 불안해하고 주변 상황에 예민한 사람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낮은 편이고, 감정에 잘 휩싸이는 편이다. 대학원 막 학기, 이게 전부 헛된 노력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는 반 년동안 꼼짝도 못 하고 아무것도 하다 겨우 졸업했다. 종종 그때의 무기력한 감각이 살아날까 두렵기도 해서 참 열심히 노를 저어왔다.


밥벌이를 하면서 나는 몇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생각을 조율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혼자 일한다면 찾을 수 없는 답도 동료들과 함께 논의해 보다 보면 답을 짚어낼 수 있었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에 대한 실마리를 얻어보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publy 기고글에 있다.).


둘, 힘든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고 직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무언가 잘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더라도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 덕에 눈을 딱 감고 뛰어들어 진행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있었다.


셋,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을 배웠다. 직관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근거를 찾는 사람이 되었고,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신중함이 더해졌다. 다양한 의견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업무를 하면서 어떤 의사결정을 내릴 때 왜 그랬는지 한 번이라도 이유를 더 생각하려 한다.


넷, 맷집을 키워주었다. 때때로 일을 하는 중간에 마음이 상처 입는 경우가 생겼다. 때로 그 상처가 너무 커서 2년 동안 직면하기 어려웠던 적도 있었다(자세한 이야기는 구렸던 나 용서하기에 써두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들이 비슷한 고난이 닥쳐왔을 때 나를 막아주는 맷집, 혹은 굳은살이 되어주었다.


다섯, 생계를 책임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는 밥벌이의 대가인 "돈"에 대한 이야기인데, 돈이 얼마나 많은 슬픔에서 나를 지켜주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 힘을 주었다. 그 덕에 일을 직면할 수 있었나 보다.


이렇게 보낸 오 년을 뒤돌아보니 어떤 여정이 완성되어있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굴곡이 많은 오 년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기획자로서의 길을 찾아내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고, 기획자로 IT 업계에 진입한 뒤에도 이직이 잦았다. 그래서 도메인이 일정치 않았고, 압도적인 성취를 이뤄내거나 제품을 운영하고 성장시키는 사이클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 여정이 너무 특이한 탓인지, 면접을 가면 질문 공세를 받곤 한다. 어쩌면 나만의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나조차 내 상황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나의 커리어 여정을 되짚어보곤 한다.


하지만 오년간 경험한 것들은 스스로를 못 믿는 예민한 나에게 어떤 믿음을 심어주었다. 힘들더라도, 툴툴대더라도 너는 결국 집요하게 해내고 말 거라고.


한편 밥벌이 때문에 한 구석은 영영 고장 난 것 같다. 나는 이십대 초반처럼 예전처럼 웃느라 배를 부여잡고 길거리에서 낄낄거리지 않고, 작은 일에도 쉽게 기뻐하지 않는다. 스트레스 때문에 체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졌다. 이제 더 이상 큰 꿈을 꾸거나, 과감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좀 더 악착스러운 사람이 되었나 보다. 그럼에도 일과 팀에 기대하는 바가 많은 걸 보면 어딘가 낭만적인 구석은 있는것 같지만.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결혼을 하면서 작가가 되려 했던 남편을 먹여 살리겠다는, 내 무모한 "낭만"을 담당했던 남편에게 종종 하는 소리다.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거라 생각했지만, 남편은 몇 년 동안 몸이 낫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고, 작년을 기점으로 나의 잔소리 게이지도 늘어만 가고 있다.


그 사이 이런저런 글을 꾸준히 쓰면서 몇백 번* 넘는 (자체) 마감을 치러내기도 한 나는, 일을 네 시간밖에 안 했다고? 라며 악독하게 채찍질하고 있다. 남편 일이 언젠가 궤도에 오르면 내가 스케줄 관리하는 발 닦개.. 아니 편집자가 되어주겠다 했는데, 아마 악독 편집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밥벌이를 담당하면서 나는 철이 들어버렸고, 이건 아마도 오 년 동안 꾸준히 돈을 벌고 글을 써오면서 해냈다, 는 감각이 누적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인생에는 이런 "해냈다"는 감각이 필요할 것이다. 남편도 그런 감각을 찾아보길 바라보다가 이 글을 써보았다.


*마감이 몇백 번일 수 있는 이유는, 문장 줍기 마감(100번)+백일 글쓰기 시즌 1(50번)+백일 글쓰기 시즌 2(100번)+22년도 주간 일기 및 에세이, 기고글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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