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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혜미 Oct 22. 2020

나는 9급 공무원에 합격했"었"다

-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야기



햇수를 세어 보다가 깜짝 놀라버렸다. 합격의 기쁨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 전 이야기라니. 지금도 충분히 그때의 기분을 생생하게 적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정한 글감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5년 전 이야기를 우려먹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인기 동영상은 다 퇴사 이야기

블로그에서도 유튜브에서도 요 근래에는 퇴사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나마 나에게 제일 따끈따끈한 에피소드이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핫하게 다가오는 것이 공무원 퇴사 이야기이니까.


그러나 브런치에 내 이야기를 차근차근 담아보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시기는 퇴사가 아닌 입사 시절, 공무원에 합격한 그 순간이었다. 그때그때 남겨두기를 좋아한 덕분에 당시의 기록도 갖고 있지만, 이렇게 퇴사 후에 떠올리는 건 처음이라 추억여행의 느낌도 든다.


9급 공무원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냐 싶지만서도 적어도 당시 나에게는 9급 공무원이 인생의 목표였기 때문에 합격의 순간은 '내 인생의 목표를 이룬 순간'이었다. 그러니 나의 자랑스러운 역사일 수밖에.







왜 9급 공무원이야?


'평범'이라는 두 글자는 딱 나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여느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왔고 평범한 전공을 가진 나에게, '취업'이라는 단어는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 느낄 만큼의 두려움을 주는 꽤 무서운 존재였다.


그랬다. 한마디로 취업이 두려웠다. '스펙이랄 것도 없고 가진건 학점밖에 없는 내가 소위 고스펙자들을 이기고 취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입사하고 싶은 회사나 관심이 가는 기업이 없었고 취업에 대한 열정도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있었기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는 공무원은 나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당시 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역할을 하고 싶었기에 육아휴직 등의 복지가 보장되어 있는 공무원이 제격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게 됐다. 두려운 감정에 비해 선택의 이유가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일단 합격하면 그 안에서 지지고 볶더라도 그냥 살아질 줄 알았다.







합격을 하기까지


목표는 1년이었지만 보통의 머리를 가진 나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웠고, 그 덕분에 공무원 시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년 차 때는 세 개의 공무원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아깝지도 않은 점수였다. 이게 정말 되는 시험인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첫 독서실

수험생활 2년 차. 1년 차 때처럼만 하면 되겠지 했지만 절대 1년 차처럼 공부할 수 없었다.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1년 차 때와 2년 차 때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달랐고, 내 머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었다. 1년 차 때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앉아서 공부했지만, 2년 차 때는 저녁 5-6시가 되면 머리가 너무 아파왔다.


몸도 많이 망가졌다. 20대 초반에 무서움을 이겨내고 했던 라섹수술에도 불구하고 시력은 뚝뚝 떨어졌고, 하루는 너무 극심한 두통에 자다 깨서 엉엉 울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공부하니 뒷목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수험생활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통증은 늘 내 목과 어깨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 영광의(?) 친구가 되었다.


공부하다가 미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만큼 2년 차는 정말 힘들었고, 수능을 앞둔 고3 시절보다 열 배는 더 열심히 살아갔다.


지방직 시험은 반가웠던 모교에서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었던 2년이 지났고, 나는 드디어 국가직, 지방직, 그리고 서울시 9급 공무원에 모두 합격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 3관왕이라고 불리는 그 왕관을 내가 쓸 줄은 합격하는 그 날까지 생각도, 상상도 못했다.







합격해서 행복했어


인생의 목표를 이뤘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워낙 걱정이 많은 성격이다 보니 합격 후에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것을 보면 행복의 크기가 엄청났던 것 같다.


첫 시험인 국가직에서는 채점을 하다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기쁨에 벅차서 눈물이 난다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뚝뚝한 아빠에게 처음 문자를 받아봤고, 주책인 엄마는 처음 보는 매장 직원에게 '우리 딸이 이번에 공무원에 합격해서요'라는 굳이 필요 없을 추임새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앞에서는 작작 하라고 했지만 내가 부모님의 자랑이 된다는 것이 내심 기뻤다. 명절에는 큰아빠께서 우리 집안에도 공무원이 나왔다며 공식 발표(?) 인마냥 말씀을 하셨고, 부모님은 자식농사를 어쩜 그렇게 잘했냐며 부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했다.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공무원 카페에서 동행자를 구해 유럽여행을 다녀왔고, 취업에 성공한 대학생 신분으로 남은 학기는 마음 편히 놀러 다닐 수 있었다. 덕분에 공든 학점은 무너졌지만 이제는 나와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생각 안 해도 되는, 정말 달콤한 합격 이후의 시간이었다.

나도 유럽여행을 했다!






국가직이냐, 연고지냐, 서울시냐


물론 행복한 고민이었다. 하나만 붙어도 감사합니다 하고 들어갔을 텐데,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순간이 왔다니. 이제는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뚜렷하게 원하는 곳이 있던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고민했다. 국가직은 너무 힘든 부처라고 알려졌기에 진작 임용 포기서를 작성했고, 남은 두 군데인 연고지와 서울시 중 고민이 많았다.


긴 고민 끝에, 서울시에서 일단 근무를 해보고 너무 힘들면 교류 시스템을 이용해서 내가 살던 연고지로 내려가자 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서울시의 한 자치구 9급 공무원이 되었다.

즐거웠던 서울시 9급 공무원 신규자 교육







그리고 그 후


공부하는 시간은 불안함의 연속이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합격의 기쁨은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달콤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공무원으로서의 생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공무원이 됨으로써 누구보다 평범한 직장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합격  후 이 이야기의 끝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니라 '4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었습니다'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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