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자 Dec 06. 2015

상담을 끊자마자 우울증이 도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 지금처럼 우울이 올라왔을 때는 브런치도 뭐고 글쓰기고 뭐고 다 웃긴 짓이다. 너무 고상한 짓이다. 다른 사람에게 읽힐 뭔가를 정상적으로 쓴다는 거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독자고 뭐고 나발이고 없다.


하지만 난 상담을 끊었다. 어디다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가능한 찬찬히 글을 쓰며 자신을 다스려 봐야 한다. 그래서 이성 보고 발동하라고 여기다 글을 쓰기 한다. 너 이 자식 기능 좀 하라고.


지난 몇 주 간은 미친 듯이 사람을 만났다.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나는 내가 일을 마치고 혼자 집에 들어 가면 우울하여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더 우울하게 출근할 것을 알았다. 회사 사람들은, 처음에도 그랬지만, 갈수록 점점 내 조울을 감지하고 있다. 회사와 회사 사람들, 회사 문화, 업무 뭐 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 없는 나는 '그래 씨발 것들아 배 째라 니가 뭐 보태준 거 있냐'는 심정으로 엉덩이를 지지고 앉아 있지만, 맘이 편치 않다. 당연히 편할 리가 없다.


나는 목표가 높다. 물론 생각만으로다. 그러니 눈이 높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정작 내가 사는 삶은, 살아온 행적은, 매일 하는 행동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나는 죽었다 깨어 나도 하기 싫은 걸 못하더라. 내가 처음으로 우울증이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웬만한 모든 것들을 다 싫어한다는 것이다. 맘에 드는 게 없다. 아니, 만족하는 법을 모르는 거일지도 모른다. 사실 문제가 뭔지는 안다. 내가 나를 끔찍히도 싫어 한다는 거. 알긴 안다. 머리로만.


고등학교 때 내 우울증이 심했던 이유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참아가면서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진퇴양난이었다. 내가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대학 때는 좀 나아졌지만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살이 빠지고 외형적 개선이 일어나면서 자신감이 좀 생겼고, 돈을 내고 취업 학원에 다니면서 칭찬과 지지를 샀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 나았다. 그렇게 어찌 저찌 나한테 돈을 주겠다는 회사가 생겨서 당분간 조금 괜찮기도 했다. 크지 않은 돈이지만 마침내 거지 같던 부모님에게 경제적 독립을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꿈에 그리던 '내가 사고 싶은 걸 사기'를 해보면서 주말에 행복을 누리고 주중의 고통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한계가 온다. 일주일은 7일이고 회사에 있는 시간은 5일. 숨쉬는 시간 70%를 '이 순간만 모면하자'는 생각으로 사니까 정말 혐오스럽다.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직장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주말처럼 개인 시간이 주어지면 이에 대한 공부를 하기는 커녕, 주중에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번아웃 되어 아무 텍스트도 소화하지 못하고 - 대학 때도 그래 왔듯이 - 멍만 때리며 우울해하고 있다.


이번 주만큼은 스스로에게 시간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고쳐 가며, 지난 몇 개월 동안 입사 후에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쓸 부분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이 곳에 머무는 이상 앞으로도 달라질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아무 진전도 하지 못하고 우울감에 휩싸여 울기만 했다. 그러다 브런치를 켰다.


참 병신이다. '무언가 나의 발전을 위해 해야하는 일'만 마주하면 벌벌 떨면서 결국 하지를 못한다. '어차피 안 될 거야. 또 떨어지겠지. 그럼 또 포기하겠지. 그렇다면 대충 해버릴까? 아냐 그러면 나아지는 게 없어-' 의 무한 반복.


난 어렸을 때부터 책(교과서든, 기사든, 소설이든)을 읽을 때 읽기 싫은 부분은 절대 읽지 못하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습관이 있다. 당장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야 하고, 두 번 다시 그걸 보기 싫다. 다시 봐 봤자 나아질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액션도 취하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하다가, 마음 아파하고, 위로 받고 싶어하고, 그래서 결국 안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고쳐지지가 않다.


다 변명이다. 감내하지 않으면 바뀌는 게 없고, 바뀌지 않는 게 싫다면 어떻게서든 감내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좀 쉬웠던 적이 있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