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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태 Feb 28. 2016

시를 쓴다 vs 총을 잡는다

영화 '동주'- 세계를 바꾸고 싶었던 두 청년의 같은 꿈, 다른 접근

내가 대학생 시절 많이 읽었던 책은 평전류였는데, 그중 가장 압권은 <윤동주 평전>(송우혜 저/푸른역사)이었다. 그 책을 읽기 전 윤동주는 내겐 '시인'이었다. 책에서 윤동주는 또 다른 범주의 '독립운동가'로 묘사된다. 사실 그는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사촌지간이자, 삶의 목표뿐아니라 죽음의 지점까지 동일했던, 두 사람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번갈아 보여준다. 험난하고 슬펐던 일제시대의 변곡점을 통과해가며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서로에게서 낯선 삶을 발견한다.  


몽규에게 동주는 '시라는 감성적 접근'으로 민족을 나약하게 만드는 '사상가'(thinker)이었다. 동주에게 몽규는 '모든 것이 실용적이어야 하며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 '행동가'(doer)이었다. 한 사람은 관념과 이상을 통해 왜곡된 현실의 삶을 재구성하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전략과 행동을 통해 왜곡된 현실을 바꾸어보려 했다. 한 사람은 시를 썼고, 한 사람은 총을 잡았다. 삶이 힘들 때, 누구의 선택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까 (몽규가 동주에게)



동주는 비밀스러운 여러 활동을 하는 몽규가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다. '니는 계속 시를 쓰라'는 것은 너는 현실을 모르니, 계속 관념에 머물러 있으라라는 말처럼 들린다. '행동가'들에게 '사상가'는 말 장난을 하는 사람들이다. 현실을 모르고, 단어와 단어의 집 속에 빠져들어, 현실세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몽규에게 동주는 가장 나약한 사람이다.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동주가 몽규에게)



몽규는 일본군 장교로의 위장참여 등 외부 현실의 변화를 통해 결국 사람들이 '국가가 국가를, 민족이 민족을 탄압하는 구 질서'를 벗어 던지고, 각자의 평화를 누리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동주에게 몽규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가장 나약했던 한 사람, 그리고 가장 위험했던 다른 한 사람은 결국 감옥에서 서로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서로 마주보는 시선을 통해 인정하게 된다. 시를 쓰는 것이나 총을 잡는 것이나 결국 누가 누구에게 더 우월하고 더 올바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각자의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것을. 몽규는 동주에게 "이제 너랑 함께 할 꺼다"라고 말하고, 동주 역시 몽규의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일본으로 마지막 무대를 옮긴다. 


마지막 장면. 일본 순사를 통해 취조를 당하는 두 사람은 따로따로 동일하게 '서명'을 요구받는다. 이러이러한 혐의로 '조선독립'이란 꿈을 모의했다는 각자의 죄목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서명을 하라는 것이다. '행동가'였던 몽규는 '이게 정말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인데' 절규를 하지만 당당히 자신의 꿈을 숨기지 않는다.  총을 잡았던 그의 손이 서명을 한다. '사상가'였던 동주는 "이 시대에 태어나 시인이 하고 싶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당당히 물러선다. 시를 썼던 그의 손은 서명을 거부한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선택으로, 각자 자신의 삶의 가장 최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사회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접근은 다르다. 한 사람은 언어의 문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행동의 문을 열고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려 했다. 영화 '동주'는 두 사람의 삶을 균형있게 조명한다. 달랐지만, 달랐기에 서로의 역할이 왜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동주와 몽규는 깨닫는다. 


현실에서 나는 사회혁신을 꿈꾼다. 우리 모두 접근이 다르다. 그렇다고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고, 더 올바른 것이라 쉽게 말할 수 없다. 시를 쓴다고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총을 잡는다고 이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르기에,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의 역할과 관점 중에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판정짓고 싶지 않다. 


내가 동주라면, 나의 선택도 소중하고 의미있음을 깨닫고 떠나지 않는 '몽규'를, 내가 몽규라면 나의 선택이 비록 불가능해보여도 함께 하겠다고 찾아오는 '동주'를 만나고 싶다. 


영화 '동주'는 동주의 시선이 아래 영화의 핵심 장면에서와 같이 거울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몽규를 발견하는 거울과 같다. 우리 내면의 동주와 외면의 몽규를, 혹은 우리 내면의 몽규와 외면의 동주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당신의 시선은 오른쪽, 왼쪽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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