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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당신을 만나지 않는 이유

튀르키예에서 4년을 살다 돌아온 나에 대한 자기 객관화

by 미네


이십여 일 전,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남편 없이 이스탄불에서 한국 인천공항을 향하는 비행기를 올랐다. 이스탄불에 살곤 내 생애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비행기를 탔다. 그 비행기는 때론 마구 흔들리기도 했고, 가끔은 편안하고 즐겁게 나와 우리 가족을 새로운 목적지로 내려주었다.

마치 매일 새로운 모험을 하는 탐험가처럼, 아이와 시작한 그곳의 삶은 예상과는 달랐다.


짐을 싸고 푸는 것조차 기계처럼 되어가던 나는 그 어느 순간부터는 이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제는 마지막으로 타는 국적기 비행기, 아들과 단둘이 탄 비행기는 한국에 다다르기 전 터뷸런스를 만나 우리의 몸을 몇 번이고 공중에 띄웠다. 아들은 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나 죽는 거야?"

"아니, 엄마가 너는 어떻게든 꼭 살릴 거야."


지난 제주항공사고 때문일까. 비행기가 갑자기 아들과 나의 몸을 '붕'하고 띄웠을 때, 우리 자리 뒤의 중년의 아저씨는 쌍시옷 욕을 걸쭉하게 내뱉었다. 죽기 직전의 누군가의 마지막 외침 같아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나도 그 순간 정말 하고 싶었던 욕이었는데. 아하하. 그의 구수한 욕에 답답한 속이 시원했다.


정말 운 좋게 그날의 비행기는 그 속에 있던 모든 인생들을 다시 살려 인천공항에 내려주었다.


덜덜 떠는 아들을 꼭 안아 우리는 이스탄불보다 여섯 시간 빠른 한국에 도착했다. 사 년 전 어린 아들을 안고 갔던 나는 아마 이 상황에서 엉엉 울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도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아들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또 한다.


"아들아, 우리 진짜 운 좋다. 이번에 액땜 다 했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손을 아들 앞에서 숨기고, 태연히 짐을 잡아 인천공항의 편의점에 들러 아들이 그동안 먹고 싶었다는 새우로 만든 깡이 가득한 과자를 아들에게 쥐어준다.

이제 나의 깡은 이 과자보다 세다. 아하하.


이스탄불에서 3개월 넘게 걸려서 받는 과자가 이렇게 쉽게 내 손에 오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한국 카드로 결제를 하니 카드승인의 부정사용에 대한 경고 문자도 온다. 내가 정말 한국에 오긴 왔나 보다.


4월에 주문해서 6월에 도착한다던 한국산 과자와 라면은 아들과 내가 비행기를 타던 그 무더운 8월, 찌그러진 상자에 실려 그동안의 고난을 증명하듯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라엘 전쟁 때문에 이 배 저 배에 바꿔 타며 어렵게 녀석들은 이스탄불 집의 문 앞에 놓였다. 너무 반갑다. 상자를 열어 녀석들 몸에 적힌 그들의 숫자를 확인한다. 한국이라면 어쩌면 곧 폐기 처분될 녀석들도 여기선 제법 귀한 대접이다. 하나씩 곱게 분류했다.



9월의 한국. 아들을 학교에 보내곤, 오랜만에 매운 컵라면을 먹고 싶어 친정엄마네 집을 뒤져본다. 엄마는 그거는 유통기한이 지났다며, 그 라면을 외가의 꼬꼬닭에게 가져다줄 거라고 이야기하신다.


괜히 지난 라면 유통기한 숫자를 읽으며, 아직 무더운 지금, 언제고 잡아먹힐 녀석들이 요리조리 피하며 제 목숨의 차례를 미루는, 외삼촌이 키우는 꼬꼬닭이나 겨우 먹을 유통기한 한참 지난 컵라면에 펄펄 끓는 물을 부어본다.


"엄마, 이거 아직 먹을 만 한데."

"야, 먹지 마라."


아직 아들의 장난감이 실린 이삿짐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바다 위에서 떠돌고 있다. 남편도 아직 이스탄불 우리 집에 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직 온 가족이 모이지 못한 한국의 우리 집에 가서 그동안 내 사랑이 없어 상한 우리 집을 고칠 기술자 아저씨들을 만난다.

여섯 시간 빠르게 이스탄불에서 결혼 생활 처음, 혼자 맞이할 그의 생일을 축하한다.


"혼자라도 미역국 맛있게 끓여 먹어요."



그동안 누군가는 내게 나의 경험을 나눠달라며 만나달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고민을 하며 주재원 생활에 대한 상담 메일을 보냈다. 나는 한참을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그동안의 나는 올바른 조언을 할 수 있겠는가.


아직 나는 한국 농촌의 꼬꼬가 먹을 라면이 맛이 있을 시기이니, 그녀를 만나면 분명 '꼰대'같은 소리만 늘어 놓을 게 뻔하다. 자기 객관화가 분명한 나는 잠깐 글쓰기를 멈추었다.


그래도 누가 내게 다시 시간을 되돌려 이스탄불에 가야 하는 상황에 놓아준다면, 나는 다시 아들과 남편과 함께 어쩌면 한국의 꼬꼬닭도 먹지 않을 그 라면을 다시 먹으러 갈 것이다.


이스탄불에 4년을 살다 돌아온 나는 친정집에서 아들을 학교로 보내고, 남편 없이 곧 이삿짐이 올 집의 이런저런 준비를 하곤 돌아와 유통기한 지난 컵라면을 후루룩 거린다. 그런 내게 친정엄마는 괜히 화를 낸다.


"이제 뭐 먹고 맛있다 소리도 하지 마. 들을수록 속상해."

한국이라면 꼬꼬닭이 이리저리 땅에 고개를 숙여가며 주워 먹었을 라면은 아직, 내게 그렇게 참 맛있었다.


이제는 씩씩하게 나를 앞서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 8월의 이스탄불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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