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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틴 거리로

프롤로그, 소설 '이스탄불 에틸레르에 살아요.'

by 미네


매일 아침 느지막이 햇살을 맞으러 나가면 그녀가 나를 불렀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 시떼에서 만난 그녀는 내 몸집이 제법 작을 때부터 나를 보러 왔다.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내 목에 목걸이도 달아주고 제법 친근했는데, 요즘은 내가 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나도 좀 커서 그런지 뭐든지 심드렁하다. 한참 뭔가 내 눈앞에 무언가를 흔들고 갔는데, 예전만큼 재미가 없다. 손으로 몇 번 툭툭 치다 다시 웅크리고 앉았다.


내가 문제인 건지, 생활의 익숙함이 만든 무료함인지, 목걸이도 걸리적거려 손으로 몇 번 밀어냈더니 이내 모든 것이 풀어져버렸다. 함께 사는 이 사람이 익숙해진 것처럼, 나도 그녀와 그 녀석을 보는 것이 그저 일상이었다.


그래도 거의 매일 나를 보러 오던 그녀와 그 녀석이 막상 없어지니 마음이 이상하다.


'이게 무슨 느낌일까.'


이번 여름도 그 더운 날도, 그녀는 나를 보러 나왔는데, 늘 같은 어조로 나를 부르며 호들갑스럽게 뛰어오던 그 녀석도 없어졌다. 괜히 모든 게 심드렁해지기 시작하다 한참 그 시간에 오나 하고 기다리다가, 이젠 좀 걱정이 된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방학이라며 아이들을 몰고 이 시떼 사람들이 한가득 캐리어를 밀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집의 창문의 셔터가 내려가고, 내가 사는 집의 윗집 할머니의 앙칼진 목소리 탓에 우리 집 천장 가까이 제일 높은 곳에 누워있던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또 시작이군. 더워지겠네'


내 울음에 우리 집 사람은 나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한참 그녀와 그 녀석도 보이지 않았다.


길어야 두 달이면 돌아오겠지. 그런지 어느새 3개월이 지났다. 집 벽에 달린 숫자랑 글자가 나란히 줄지어 가득한 그것이 세 번째 찢어졌으니 사람들이 말하는 석 달이다. 내 털 끝에 이젠 찬바람이 스친다. 비가 오려고 하는 걸까. 이 맘 때면 녀석이 캐럴을 부르며 화단에 나뭇잎을 딸 때인데, 옆에서 그녀는 나뭇잎을 왜 떼냐고 그 녀석을 혼낼 텐데. 요즘 왜 나를 부르러 오지 않는지. 계속 무심한 척하고 싶었지만, 결국 녀석이 살던 시떼의 건물로 걸어가 본다.


높은 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라 몸을 쭉 뻗어본다. 여기 즈음일까 하고 잘 들릴까 하며 소리 내어 본다. 평소보다 제법 크게 소리를 내어 불러본다.

여느 때 같으면 저기 창문이 벌써 열릴 텐데. 이상하다. 정말. 한 번 더 큰 소리로 소리를 내본다. 녀석과 그녀가 살던 그 창문은 여전히 미동이 없다. 속상한 마음에 평소와 달리 더 큰 소리로 울어본다. 그때 갑자기 덜컹, 문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차가워."


결국 물벼락이다. 지난겨울 혼자가 된 일층 할머니가 하얀 커튼을 들어 나를 보고 계셨나 보다. 다행히 몸이 온전히 젖지는 않았지만, 내 털끝이 바짝 섰다. 날렵한 나였기에 망정이지 너무나 아슬아슬했다.


아무래도 그녀와 그 녀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한 달 전에 시끄러운 그 녀석과 비슷하게 생긴 아저씨가 뜬금없이 내게 밥을 푸짐하게 주었는데, 저번엔 그 아저씨가 이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보니 집에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모두 없어져 있다.


'침대만 있잖아. '


'이상하다. 정말.'


속상하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서러움이 몰려온다. 아무래도 그녀가 나를 쓰다듬던 손길이, 그 녀석의 길게 뻗어지는 나를 부르던 그 부름이 듣고 싶나 보다.


내가 늘 가던 이 길을 벗어나, 그녀는 매일 아침 커피 냄새를 내며 저 쇠문을 넘어서 내게 다가왔다. 그 녀석을 학교에 보내고 왔다며 내게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잡담이 시끄러워도, 그동안 같이 한 바퀴 시떼를 도는 것이 좋았나 보다. 우리는 그렇게 이 시떼 안에서 매일 산책을 했다. 내가 참 작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걸었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난 그녀가 솔직히 참 좋았다.


내가 몇 번을 할퀴었는데. 그녀와 묘하게 닮은 녀석까지, 나는 아무래도 그동안 둘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햇살이 비치는 곳에 올라 한껏 몸을 뻗었다 다시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곤 시떼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 사람들과 다른 말을 쓰던 그녀와 그 녀석, 외모도 퍽이나 달랐다. 이럴 줄 몰랐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집을 잃어버리다니 말도 안 된다. 저 쇠문을 혼자 나갈 때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다. 이럴 줄 알았다. 말도 이상하게 하고 한참 다른 말해서 무슨 말인지 온전히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내 나이 다섯 살, 이제야 온전히 그녀와 그 녀석의 말을 알아듣는다. 정말 귀찮게 해서, 내가 참 피곤했는데. 지금 이 젖은 털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그 목소리가 듣고 싶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어설픈 그녀와 녀석이 이스탄불에서 길을 잃은 게 틀림없다. 바보같이 어떤 녀석에게 할큄을 당하곤 웃고 있는 건 아닌가. 괜히 걱정이 몰려온다.


아무래도 내가 찾으러 나가야겠다. 나한테 한참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지난여름에 한참 나를 보며 울던 그녀였다.

분명 처음에 이 시떼에서 길을 잃고 집을 못 찾았던 나처럼, 그녀도 그 녀석을 데리고 나가서 이 이스탄불의 어느 곳에서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좀 다르게 생긴, 여기 사람들과 다른 말을 하던 그녀가 또 어설프게 웃으며 그 녀석을 데리고 실수를 하곤 길을 잃은 게 틀림없다.


그녀는 가끔 그렇게 허술했으니까.

할퀴던 날 보며 곧잘 웃었으니 또 잊고 덤벙거리며, 무언가를 잃어버린 게 틀림없을 것이다.


곧 더 추워질 텐데, 걱정이 된다. 사람들이 앞으로 추워진다고 했는데, 이제 비도 전보다 자주 오는데 밖에서 둘이서 떨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가 나를 부르며 이 시떼 덤불 속에 있던 나를 찾던 그날처럼, 이제는 내가 그녀와 그 녀석을 찾으러 가야겠다.


에틸레르 제이틴 거리, 그녀가 내게 제이틴이 올리브라고 했는데. 솔직히 나한테 제이틴이든 올리브든 둘 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어서 집 밖을 나가봐야겠다.


'아, 너무 귀찮군. 번거롭지만 착한 내가 나서야 되네. 아휴, 정말.'


그렇게 나는 이스탄불 에틸레르 제이틴 거리로 첫걸음을 나섰다. 생애 처음으로 저 쇠 문 너머 집 밖을 나선다.


"두렵지만 나가봐야지."


귀찮은 그녀와 그 녀석을 찾아 이스탄불 에틸레르 거리로 나가본다. 커다란 쇠문 아래에 작은 틈이 보인다. 규벤릭 아저씨가 보시기 전에 얼른 나가야겠다. 문 틈의 털 뭉치와 먼지가 몸에 묻는다. 이게 뭔 고생인지, 꾸깃꾸깃 몸을 작게 말아 고개를 집어넣었다. 이번에 살도 좀 빼야겠다.


'아이고, 목이야. 이게 무슨 고생이야. 찾기만 해 봐라. 내가 정말 혼내줄 거야!'


"냐아옹!"


시떼: 이스탄불의 빌라 단지를 부르는 표현

규벤릭: 안전, 보안 경비 업무를 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표현







미네의 브런치 사상 첫 소설, '이스탄불 에틸레르에 살아요.'를 드디어 시작합니다.


연재 지각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은 아들이 독감에 걸리고, 저도 연달아 아프고(줄줄 변명 중입니다. 아하하.)그리고 이런저런 시험을 보고, 이스탄불 에틸레르에서 드디어 석 달만에 이삿짐이 한국집에 왔습니다. 진짜 한국 삶이 시작되겠죠. 고생문이 열렸어요. 그동안 인생의 숙제를 좀 했습니다. 아하하.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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