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큐브에서 켄 로치 감독의 신작을 봤다.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영화 속에서 주인 없는 집에 택배를 두고 갈 때 쓰는 메모지 문구와 같다. 택배 노동을 하는 남편과 돌봄 노동을 하는 아내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영국 노동자 가족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부부의 노동은 시간급이 아닌 건당 보수를 받는 형태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노동 방식과 형태를 결정하는 실질적 고용주의 통제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은 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보호를 받는다. 개인이 사업체가 되어 특정 플랫폼에 고용된 형태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긱 이코노미'로 일컬어지는 플랫폼 노동의 이면이다.
켄 로치는 그의 2019년작에서 이러한 새로운 노동의 모습을 화두로 제시한다.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희박한 영국의 현실 속에서 금융위기로 직장과 집을 잃은 가족. 한번 발을 헛디딘 이후로 그들의 삶은 모래지옥 같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한다. 결국 생존을 위해 남편 리키는 '총알배송'을 절대가치로 내세우는 택배 업체에 고용되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시간에 쫓기며 택배를 배달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극한의 노동조건에 내몰리는 가족 구성원과 그에 따른 감지되는 이상징후들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노동이 평화롭던 가족 관계를 무너뜨리고 없던 빚을 늘려가는 부조리한 현실이 그려진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켄 로치는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상대적으로) 정돈된 서사구조와 달리 굉장히 리얼리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엔딩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 정도로 갑작스럽다. 무차별한 폭행으로 부상을 당한 리키가 가족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다시 택배일을 하러 나서는 장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이 가족들의 앞날은 어떻게 펼쳐질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현실을 충분히 담아냈기에 그 이후까지도 스크린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을까. 리키의 마지막 눈빛에서 읽히는 불안과 절망의 깊이 때문에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한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아내 애비는 병들고 나이 든 환자들을 업무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가족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환자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일의 의미를 찾고 위안을 얻는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는 리키도 마찬가지다. 그는 길고 복잡한 운송 노선 안에서도 택배를 전달하며 얼굴을 마주하는 고객들과 살갑게 인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플랫폼과 자율 계약이 노동을 탈인격화하고 파편화시키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속에서 생겨나는 신뢰에 있다는 것이 켄 로치라는 거장의 통찰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런 희망을 아주 스쳐가듯 보여주기만 할뿐 정작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던지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냉소적인 태도 또한 현실의 반영인 걸까.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남는다. 힘 없고 기댈 곳 없는 개인의 권리는 누가 지켜주나. 자신도, 가족도, 회사도, 사회도 책임지고 지켜주지 못하는 권리는 무슨 의미인가. 노장 감독은 이번에도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삶의 조건 속에서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누군가의 고통을 포착해냈다. 그 고통에 대한 답은 아마도 스크린 밖에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