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학생이던 시절, 무심코 읽던 소설에서 '다사한'이라는 표현에 눈이 머문 적이 있다. '조금 따뜻한'을 뜻하는 말로, 상대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따사한'이 이 어근의 센말이다. 내겐 낯설던 표현에서 느껴지던 다감한 어감의 색채가 맘에 들어, 아직 기억하고 있다. '쟁이다'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주 들은 표현이다. '쌓아두다, 포개다, 보관하다' 등등 비슷한 표현은 많지만, '쟁여두다'처럼 구수하면서 친근한 풍미를 내는 말은 드물다.
언젠가부터 낯선 표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글이든 말이든 모아둔 표현을 적절히 사용해보려 애쓰기도 했다.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인데도, 새로운 시도는 늘 어색하기만 하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소설가 김영하 씨는 '작가란 말을 수집하는 사람'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그 정도 거창한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언어를 재발견하고 생활에 적용하는 행위는 나만의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내게 다사한 느낌이 드는 표현들을 때때로 쟁여두며 간간히 꺼내먹으며.
활자중독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했듯, 제 취향의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어디서든 끼리끼리 모여 있기 마련이다. 종이 다이어리에 아름다운 시구를 적던 이들은 시대가 바뀌어 싸이월드에 감성글을 스크랩하기 마련이듯 말이다. 글을 읽고 쓰는 이들에게도 힙합 표현은 늘 있어왔다.
'적확'이 유행처럼 퍼지던 때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과 소설이 한창 인기이던 시절, 나 역시 그의 작품 속에서 접한 이 표현의 매력에 빠졌다. '정확'과는 미묘하게 다른 뜻을 지닌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표적을 지정해 찌르는 듯한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2015년, 새로운 '맥북'이 출시되자 애플은 한국 공식 홈페이지에 '톺아보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샅샅이 더듬어 찾아본다'는 의미의 이 순우리말 단어는 한때 사람들이 오타로 오해하며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새로 접한 단어 중 가장 힙하다 싶던 말은 단연코 '핍진(逼眞)'이 아니었을까. 한자를 직독 하면 '진실에 가까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언어는, 문학이나 평론 글 등에서 진리나 본질 등에 가까이 다가선 모양새를 설명할 때 쓰인다. 자주 사용되는 '근사하다' 역시 '사실에 가까이 다다르어 경탄스럽다'는 의미로 쓰여 그 뿌리가 유사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르게 쓰이는 것이 흥미로울 따름이다.
올해 여름, 평론가 '이동진'이 영화 <기생충>에 대해 남긴 한줄평이 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누군가는 어렵고 현학적이라고, 젠 체 하는 것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반대급부로 무식에 대한 긍정이라며 비난을 비난한 이들도 있다. 영화에 대한 평론을 읽는 것도 귀찮아한 줄로 축약되는 추세가, 단어의 어려움을 낳은 것이라는 의견마저 들렸다. 한줄평 자체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이해도와는 별개로 - 개인적으로는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 새로운 단어가 늘 갈무리 대상이었던 내게 이러한 논란은 신선하기만 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 제목처럼, 우리 모두에겐 자신만의 언어로 꾸려진 정원이 하나씩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풍성하고 화려한 정원도 있겠지만, 소박하지만 단아한 정원도 있을 수 있겠다. 모든 정원에 여러 종류 화초가 어울릴리 만무하다. 하나같이 정원 가꾸는 걸 취미 삼으라 주장하기도 버겁다.
다만, 단지 생소하다는 이유로 타박은 말아야지-라고 다짐해본다. 더 나아가, 게걸스레 모아놓은 언어를 적절히 사용해야 아깝지 않은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