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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Oct 02. 2019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사는 시대

책 <정치의 발견>을 읽고

2016년, 무더운 여름, 이화여자대학교

2016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미래 라이프 대학' 설립을 강행하려는 학교에 대항하기 위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훗날 일국의 대통령을 탄핵까지 이르게 한 '나비의 날갯짓'으로 불릴 이 시위는, 여타 대학 시위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조심스럽게 준비되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돈을 모금하고, 폭력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경호업체를 고용하는 것 - 1,600여 명의 경찰들이 교내에 들이닥칠 줄은 몰랐으리라 - 뿐 아니라 총학생회 및 기존 '운동권'의 활동을 사전에 철저히 차단했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그들은 세월호 리본이나 메갈리아 티셔츠와 같이 '정치적 색깔론'의 표적이 될법한 물품 소지도 지양했다. 메시지가 오해받을 만한 요소를 애초에 박멸하겠다는 의지, 메시지를 곡해할지 모를 대표자에게 권한을 위임하지 않겠다는 의지. 바로 '탈정치'였다. 


몇몇 이들은 '탈정치의 정치성'도 모르는 바보들이라며 그들을 폄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화여대 시위의 일련의 행동들은 납득 가능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학교 학생회와 연대하여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나 '기업화'에 저항하는 것은 거대하고 이상적이다. 거대 담론은 머나먼 일처럼 느껴지기에 결론에 이르기까지 지난하고 성글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이화여대 학생들은 시위의 초점을 집중하길 원했다. '미래 라이프 대학 설립 과정에서의 학교 측과 학내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 부재' 수준까지 말이다. 오해받기 딱인 거대담론의 무임승차를 차단하겠다는 구성원들의 단호함은, 시위를 마칠 때까지 대다수 사안을 온라인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전례를 남기기에 이르렀다. 학생회를 통한 위임도, 거대한 연대도 없었다. 누군가는 이를 '달팽이 민주주의'라며 찬사 했고, 사회비평가 박권일 씨는 칼럼을 통해 '당사자주의 및 소비자 행동주의'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 2016년, 여름.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점거 현장에 방문했을 때의 글을 남긴다



2019년,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사는 시대

그로부터 3년이 지났고, 많은 대학교 학생회는 '탈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올해 4월, 숙명여자대학교 총학생회는 5.18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혐오 발언을 뱉은 동문 국회의원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정치적인 행보'를 보인다는 학내 반대 여론으로 인해 약 1달 만에 성명서를 철회한다. 학생 자치 기구인 학생회를 향한 구성원들의 탈정치화 요구는 이만큼 강력했다. 


그 2달 전인, 올해 2월. 서울대학교 노동자들은 파업을 위해 기계실 4곳을 점거하였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첫 입장문은 이랬다. "노조의 정당한 파업권을 존중합니다. 다만, 도서관과 같이 학생들의 학업과 연구에 직결되는 시설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노동자와의 연대는 학생회로써 과분하고 부담되는 정치적 행동이었기에, 그들은 학생 복지를 최우선으로 두었다. 도서관을 파업 대상에서 제외해줄 것을 거듭 요청한 학생회를 향한 학생들의 비판도 일부 있었지만, 파업 종료 후에도 총학생회는 학생들이 우선이었다고 강조할 뿐 정치적 입장과는 선을 긋는 태도를 취했다.


누군가 말했듯, 바야흐로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사는 시대다. 권위주위와 집단주의의 나쁜 면모를 지켜봐 온 젊은 세대들에겐, '무리 짓기'는 없애야 할 과거의 낡은 구습과도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나쁜 집단을 만드느니 애초에 무리 짓기를 거부하는 것이 현명하다 여긴다. 뭉쳐진 이들에게는 '정치적'이라는 낙인 - 운동권, 꿘충, 유족층, 귀족노조, 페미나치 등 - 이 찍힐 뿐이었다. 3년 전 이화여대 학생들이 메시지의 범위를 줄이고, 오해의 소지를 탈색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뭉치기보다 흩어지면? 색깔론의 조준선에서 벗어나니 자유로워진다. 그렇기에 과거의 어른들이 보기에 젊은 세대는 뭉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순적이게도, 서로 흩어지려는 각자도생의 벡터에 제재가 가해질 때에는 강하게 결집해 목소리를 낸다. 시설 파업에 대응하던 한겨울 서울대 학생들의 모습이 그러했고, 얼마 전까지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규탄 시위'가 그러하다. * 글을 쓴 시점은 2019년 9월 첫째 주이다. 9월 중순쯤 조국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공정성'을 향한 각개전투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등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규탄 시위'의 주된 공통점 중 하나는, '탈정치'를 메시지 전면에 내세운다는 데 있다. 대학으로서 바른말을 할 뿐 -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이 아니라 -이니 공작이나 악용은 배격하겠다는 뜻이다. 몇몇 대학에서는 시위 현장에서 일일이 학생증을 확인하기도 했다.


정치적 무균실, 정치적 진공상태를 만들면서까지 시위를 하려는 그 동력은 무엇일까. 스스로의 권익이 침해당한다 여길 때, 공정성이 훼손되었다 생각될 때 생기는 저항감이야 말로 이 시대의 '결집의 동인'인 것일까. 다시 한번 이화여대 시위와, "정치색을 띤 어떠한 외부세력과도 무관하다"던 그때의 현수막을 떠올린다. 직접적인 연결에는 몇 번의 논리적 비약은 필요하지만, 여하튼 공정성을 장작 삼고 기존의 정치색을 배제하려는 모습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런 형태의 '각개전투식 결집'이야말로 흩어져야 사는 시대에 어울리는 운동의 모습일지 모르겠다. 다만, 그러한 각개전투의 경험이 캠퍼스 밖의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지 못할까 걱정될 뿐이다.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는, 보상이 지불되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메시지가 침해되지 않는 것에 치중하다, 보다 더 작은 목소리와 연대하는 법을 잊을까 염려될 뿐이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낮은 기대 덕에, 사실 우린 연대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공동체를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모둠살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에 대해, 비관으로 일관하는 것 역시 위험하지는 않나 생각해 본다. 타인의 이야기를 향해 더듬이를 뻗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를 자아낼 수 있지 않나 기대해 본다. 개인의 존엄성을 건강히 지키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족

공정성 훼손에 분노하는 모교의 시위가 이해되는 동시에, 약 보름 전 청소 노동자의 죽음에 지금만큼이나 치열했었는지 곱씹어 본다. 사실, 이 글은 그 물음에서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에 상대적으로 둔감하지는 않았는지. 시인 '김수영'의 유명한 시를 말 그대로 사족처럼 떠올려본다. 무엇이 왕궁의 음탕이고, 무엇이 야경꾼에 가까운 것인지. 내 눈의 공정성 프리즘 속에는, 청소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들어갈 공간은 없는지 스스로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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