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 근육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소리엘 Jan 07. 2020

당최,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

오랜만에 즐거웠던 회식에 부쳐

팔은 안으로 굽는다?

옛 말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들 한다. 머나먼 사람보단 가까운 이에게 정이 쏠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멀고 가까움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굳이 해석하자면, 관계 맺음의 정도와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사사로운 생활에서 이 말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얼굴 트고 인사 나누는 사람에게 먼저 작은 도움을 주는 건, 사실 너무도 뻔하니까 말이다. 보통 이 옛 구절이 쓰이는 경우는, 공적인 영역에서이다. 모두에게 공정해야 할 기준이, 개인의 관계 수준에 따라 좌우되곤 하면 우리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며 말하게 되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곰곰이 그간의 업무 -내 유일한 공적 영역이다 - 이력을 되짚어 보니, 저 명제는 살짝 틀린 부분이 있다. 늘 팔이 안으로 굽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애정하는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고 까칠한 룰을 적용해야 하는 상황은 도처에 널렸다.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내가 발언해야 하는 위치가 중요한 때가 훨씬 많다. 그러니 팔은 매번 안으로 굽기 어렵다. 그보다는 '당최 팔이 밖으로는 굽지 않는다'가 더 적확한 표현이지 싶다.



까칠한 나만의, 어림짐작 허용 범위

그렇다. 팔이 늘상 안으로 굽지야 않지만, 밖으로는 도대체가 굽어지기 어렵다. 공적인 삶에서 어쩌다 한 번 허용할까 말까 할 만큼 내 작디작은 그릇에, 감정적으로 머나먼 타인을 허락할 수야 없지 않은가. 까칠한 내가, 팔 바깥의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모습을 이렇게 돌고 돌아 변명해본다.


오늘, 모처럼 좋은 소식이 있어 옛 팀 선후배들과 식사를 하는데 문득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한없이 까칠한 나이지만, 무척이나 관대해지고픈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똑똑하고 유쾌하고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 하지만, 그전에 같이 웃고 고생했던 시간들이 내 팔을 이따금 굽게 하는 원동력이지 않나 싶다. 


살면서, 대부분 좋은 사람들만 마주하는 것은 내 크나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들키면 창피할 테니 이 마음 꼭꼭 숨겨두며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갈등의 사회화'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