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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06. 2019

이름없이 민족을 아로새긴 미술가, 김주경

북한 국장과 국기를 디자인한 예술가의 삶

30년 만에 감격의 눈물


관심을 갈구하는 시대다. 너도나도 개인 방송을 하고 자기 경력을 내세운다. 남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지상 가치로 여기는 요즘. 참 미련해 보이는 경력을 가진 월북화가가 있다. 그 주인공은 평양미술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고 북한의 국장과 국기 도안을 한 김주경이다.


김주경은 학장을 퇴임하고 조용히 여생을 지내며 창작활동을 하며 지냈다. 자신이 국장과 국기 도안에 참여한 작가라고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묵묵히 후대 교육에 힘썼다. 북한 우리민족끼리는 2015년 9월 8일 ‘국장, 국기도안창작가가 받아안은 사랑’이라는 기사에서 그 사연을 소개했다.<통일뉴스. 조정훈. 北, 국장 도안 창작가 김주경 사연 소개. 2015.9.8>


당시 북한은 1978년 정부 수립 30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국가표창사업을 진행하였다. 30년동안 공을 세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찾아 높은 훈장과 선물을 주는 국가적 사업이었다. 성대한 포상이 진행되던 9월 어느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수훈사업을 검토하는 중에 국장과 국기 도안 창작에 참가한 한 미술가가 명단에 빠졌다는 자료를 발견했다. 주변 사람들이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을 때 얼마나 무거운 마음이었겠는지 간부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간부들은 30년 전 미술가를 겨우 찾아내고 당시 사연들을 발굴하여 큰 포상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랫동안 같은 인민반에 살던 주변에 이웃들도 그런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민족끼리는 "이제는 손에서 붓을 놓은 지도 오래되었고 중병으로 신고하던 백발의 노인은 봄빛을 받타 청춘의 활력을 되찾은 듯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였다"고 당시 그의 모습을 묘사했다.


국장과 국기


김주경, 그 백발의 노인은 1947년 당시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소속으로 국장과 국기 도안에 참여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 국장과 국기는 어느 나라것과도 다른 완전히 새롭고 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북한의 국장은 승리를 의미하는 붉은별, 민족의 영산 백두산, 풍요로움을 뜻하는 벼이삭, 전기화를 뜻하는 수력발전소가 담겨있다. 그중 수력발전소는 평안북도 수풍발전소로 1943년 완공 당시 동양 최대 수력발전소로 64만Kw의 전기를 생산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

김주경은 국장의 중요한 상징을 무엇으로 할지 경복궁, 트랙터 등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김정숙 여사의 제안으로 전기화를 뜻하는 수력발전소가 채택되었다고 회고했다. 국기의 가운데는 보습(농기계의 종류)을 넣자는 제안도 있었다고 한다.


2012년에 개정된 북한 사회주의 헌법 제169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쓴 붉은 띠로 땋아올려 감은 벼이삭의 타원형테두리안에 웅장한 수력발전소가 있고 그우에 혁명의 성산 백두산과 찬연히 빛나는 붉은 오각별이 있다”며 국장에 대해 규정을 하고 있다.


제170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는 기발의 가운데에 넓은 붉은 폭이 있고 그 아래우에 가는 흰폭이 있으며 그 다음에 푸른 폭이 있고 붉은 폭의 기대 달린쪽 흰 동그라미안에 붉은 오각별이 있다. 기발의 세로와 가로의 비는 1 : 2이다”라고 국기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다른 국장과 국기를 도안한 미술가는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의 조카 신해균으로 알려져있다. 북한 <조선예술>과 <천리마> 2000년 11월호에는 화가 신해균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경향신문. 최재영. 인공기 도안자는 海公선생 조카. 2001.01.09>


녹향회(綠鄕會)


김주경은 충청북도 진천군 빈농가에서 1902년 태어났다. 그는 경성제일고보 시절 동맹휴학으로 전교생이 유급을 당하면서 점차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김주경은 어려운 형편에 학비를 자기 손으로 벌어 겨우 1924년 일본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미술과가 아닌 사범과였다. 사범과가 2년이나 빨리 졸업할 수 있었던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 집안생계에 보탬이 되어야했다.


가난이 몸에 밴 그는 학창시절 일본에서 프로레타리아미술동맹에 가입했다. 1929년 귀국 후에는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작품활동과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민족적차별에 저항해 학교당국에 항의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경기도 양주에가 3년간 농사를 짓기도 했다.


김주경은 일본이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1926년부터 출품을 했다. 그는 1929년까지 3회 연속 특전을 수상할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가 식민지 어용이라는 것을 느낀 후부터 이에 맞선 전람회를 만들 결심을 한다.

가을의 자화상 1936 2인화집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방식을 실날하게 비판한 글을 발표하고 미술을 통한 대중의 계몽을 시도했다. 이렇게 결성된 ‘녹향회’는 심영섭, 장석표, 오지호 등과 함께 3년간 2번의 전시를 가졌다. 1937년에는 오지호와 함께 근대 최초로 총천연색의 2인 화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인상주의의 기수


말없이 누워있는 들산이여

그대는 어찌도 그리 말이 없는가

너무도 그대는 말이 없으니

나는 송구하여 바로 볼수 없노라

오 초연한 그대의 모습이여


헐벗은 산들이여

그대는 어찌도 그리 가진것이 없는가

너무도 그대는 가진것 없으니

나는 송구하여 바로 볼수 없노라

오 아름다운 그대의 모습이여

<조선력대미술가편람 리재현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김주경의 대표작인 <야산, 1933년, 50호, 유화>를 두고 쓴 자작시다. 이 시에는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의 아픔과 사랑이 잘 드러나있다. 그는 주로 조국의 풍경을 묘사했다.

오지호 1937 20호 2인화집

김주경은 1930년대 주로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법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연분홍, 연초록과 같은 밝은 색체와 빛을 사용한 기법을 사용했다.


<오지호·김주경 이인화집(二人畵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8>에 담긴 <오지호>에서 김주경은 만개한 꽃들과 자라나는 새싹을 통해 생명을 그리고 있다. 동아일보가 소개한 화집 출판기념회는 크게 성황을 했다고 한다. 이후 오지호와 김주경은 근대한국미술의 인상주의의 기수로 평가받고 있다.<메타비평으로서의 회화 - 김주경의 <오지호>, 홍지석>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7

그가 그린 유화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7>은 100년 전 서울시청 주변 경관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장안 제일의 양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서울 거리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다 순사가 와서 교통방해라고 못그리게 하는 일을 겪곤 했다고 한다.<서울경제, 조상인 기자, 2016.10.24>


후세를 위해 남김없이


김주경은 1939년 교육기관에 자신 작품 60여점을 기증한다. 그가 작품을 과감하게 기부하고 화집을 통해 작품을 저장해놓은 탓에 원작이 사라졌어도 화집을 통해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김주경의 해방 이전 민족미술론 연구. 신수경. 2013.12>


그는 작품을 얼마든지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음에도 소수의 돈 많은 사람을 위한 미술이 아닌 다수의 계몽을 위한 미술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감히 자신의 전 작품을 교육기관에 기증할 수 있었다.


해방을 맞이한 김주경은 민족미술을 건설하기위한 길에 나선다. 그는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본부가 이승만의 휘하에 들어가자 협회를 나온다. 이어 1946년 2월 남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다 그 해 10월 화가 중 가장 먼저 월북을 한다.


그는 1947년 9월 평양미술대학의 전신인 미술전문학교 개교를 헌신적으로 준비한다. 이후 초대 평양미술대학 학장으로 12년간 미술교육사업에 모든 것을 바쳤다. 1947년 제1회 국가미술전람회(문학예술축전 미술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다.

묘향산 1958년 144x95cm

김주경은 1958년 학장 자리를 내려놓고 강원도 평강국영농장에서 농민 들과 생활하며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활동한다. 특히 그가 풍경화에 혁명적인 주제분야를 적극 개척한 것은 미술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한다.<조선력대미술가편람 리재현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그의 대표작 <묘향산, 1958년, 144x95cm>을 보면 그 의미가 조금은 느껴진다. 묘향산의 가을을 아름답게 표현한 훌륭한 작품이다. 부드러움과 섬세한 색조는 조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자기가 그린 작품을 모두 기증한 화가.

초대 평양미술대학 학장.

한 국가의 국장과 국기의 도안자.

농촌에서 자신을 뽐내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간 화가.

평생 민족미술교육을 위해 헌신한 교육자.


김주경, 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 느낀 삶의 보람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자신보다 후대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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