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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Nov 25. 2019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 사라진 예술가 구보씨

구보씨의 일일, 갑오농민전쟁을 쓴 소설가 박태원

세상이 변하는 것을 다 느끼지 못할 만큼 인생은 짧다. 하기에 현재 내가 마주치는 영화나 소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세계관에 의해 한정적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우리가 조금 더 긴 인생을 산다면, 혹은 우리 후대들은 언젠가 만나게 될 예술가들이 있다.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 만나보기 힘든 월북 예술가들이 그 주인공이다.


구보씨의 외손자,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 박태원은 월북 예술가다. 봉준호 감독의 소외된 약자에 대한 따뜻한 눈길, 빈부격차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그 속에 담긴 유머 코드는 어딘가 외할아버지 박태원과 닮아있다. 박태원 역시 청계천을 거닐며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을 살펴보며 그 만의 위트를 보여주곤 했다.


두 예술가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박태원에 비해 봉준호는 사회적 문제에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 이유는 과거 개화기 시절에 모던보이 박태원이 느낀 문제의식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준호가 느끼는 모순이 더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은 작품에서 우리 사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괴물>은 독극물 포르말린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한강에 쏟아부은 주한미군의 실체가 나타난다. <설국열차>는 기차 맨 뒷 칸의 바퀴벌레 푸딩을 먹고사는 하층민의 모습과 맨 앞칸의 마약에 중독되어 환락 파티를 벌이는 상류층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기생충>은 계단을 통해 사회 계급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동시에 폭우로 미세먼지가 사라져 기뻐하는 상류층의 삶과 폭우로 침수된 반지하방에 똥물이 범람하는 서민층의 삶을 적나라하게 대비시킨다.


선각한 스타일리스트 구보씨


박태원은 젊은 시절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일본 유학파였다. 일제시대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안경태로 경성을 주름잡던 모던보이 박태원. 그는 스스로 호를 ‘거만한 사내’라는 뜻의 구보(仇甫)라고 지었다.


박태원은 초기 기교파 소설가였다. 그의 길고 속도감 있는 문장은 ‘독특하고 치렁치렁’ 했다. 그래서 소설가 이태준은 그를 ‘선각한 스타일리스트’라고 했다. 그는 다방면적인 예술에도 소질을 보였으며 소설가 이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방란장 주인> 같은 작품은 소설 전체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것이었고, 대학노트 한 권을 끼고 경성 시내를 답사하면서 그날의 일정을 기록하듯 써 내려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이른바 ‘고현학적 방법’이라는 당당한 이름을 내세우며 발표되었다.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304p, 조영복, 돌베게>


이렇듯 박태원은 1930년대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다. 그는 식민지 현실에서 개개인의 주관적 관심, 현실과 괴리된 이상, 전통 단절을 세련된 기교를 가지고 표현했다. 그 표현방식은 일제시기 암울한 서민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그리는 순수문학에 가까웠다.


역사소설가가 된 구보씨


1945년 해방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의 자주독립 의식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에 따라 저항문학이나 사회주의 문학 작품의 호응도 높아졌다. 박태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시류와 동떨어진 자기 작품에 대한 깊어가는 고민 속에 <수호지> 같은 중국 역사소설과 우리나라 고전작품을 재출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설 <임꺽정>은 순수문학에 갇혀있던 박태원에게 큰 파문을 던져주었다. <임꺽정>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벽초 홍명희의 역사 대하소설이다. 당시 박태원의 심정을 북한 매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제라도 홍명희 선생처럼 내 민족의 력사를 떠올린 인물들을 보여주는 력사소설을 쓰자. 이 길만이 진정한 애국자로 사는 길이며 참된 문인이 되는 길이다!”<도서 <운명의 선택 1>, 김성희, 평양출판사, 2012>


이후 박태원은 역사소설로 집필 방향을 잡아나간다. 그는 훗날 자신의 옛 작품을 돌아보며 ‘부르죠아 탁류 속에 잠겨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그의 둘째 아들 박재영 씨는 박태원의 역사소설 집필이 시작될 즈음을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1947년 9월 백양당 출판사에서 나온 《약산과 의렬단》이란 아버지 작품이 있어요. 독립투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선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정국 사장의 부탁으로, 아버지가 직접 김원봉을 만나 인터뷰하고 역사자료를 모두 조사해 쓴 작품”입니다. <문인의 유산, 가족 이야기〈10〉 소설가 박태원의 후손들, 김태완, 월간조선 2015년 10월호>


월북을 선택한 모던보이


박태원은 해방이 된 1945년 좌익계 문학단체 조선 문학가동맹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로 인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핍박을 받게 되었으며 보도연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46년 장편 <약탈자>를 연재하고, 1947년 <홍길동전> <약산과 의렬단> <조선독립순국열사전> 같은 항일투쟁 관련 작품을 쓰며 본격적인 진보적 작품을 써나가기 시작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박태원은 북에서 온 초청장을 받고 월북을 한다. 동생 박문원  역시 일찍부터 사회주의 계열 활동을 한 화가이자 평론가로 형과 같은 길을 걷는다. 박문원은 박태원의 소설집 <천변풍경>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박태원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 작가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나고 역사 소설에 대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당시 그는 김일성 주석의 권유를 듣게 된다.


“옛날의 계급투쟁을 취급한 소설도 쓸 수 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여 계급투쟁이 없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노예 사회나 봉건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의 형식이 오늘과 다를 뿐이지 노예주와 노예, 봉건영주와 농도 사이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런 계급투쟁들도 소설로 잘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농민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쓴다면 역사를 쓰듯 작품을 그저 나열할 것이 아니라 어떤 전형적인 개별적 사람들의 투쟁을 통하여 그때 사회의 농민전쟁 전반과 계급투쟁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게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1992년 2월 5일, 민족통신>


그리하여 박태원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갑오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갑오농민전쟁을 함께 쓴 부부


박태원은 신념과 끈기로 온갖 시련을 이기고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다. 그는 1965년 봄 ‘양안 시신경 위축증’과 ‘색소성 망막염’으로 실명에 이른다. 나중에는 실명도 모자라 1975년에는 고혈압에 의한 내출혈로 전신불수가 되고 만다.



당시 박태원의 절망감을 그의 아내 권영희는 <조선문학>을 통해 이렇게 소개했다.


“<계명 산천은 밝아오느냐> 제2부를 쓸 때 심한 시력감퇴를 느끼고 저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갔던 남편은 참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의 눈이 시신경 위축에 색소성 망막염이라는 것이었다. 이 병은 불치의 병일뿐 아니라 오래지 않아 눈이 멀게 될 무서운 병이었다. 날이 갈수록 시야는 점점 좁아져 글자 한자를 보려고 해도 확대경을 가져와 대야만 했다. 그는 말없이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또 밤이 오는 것도 모르면서 절망 속에서 모대 기었다.” <월북작가 박태원의 기구한 행로 2001.07.24. 연합뉴스 최척호 기자>


다행히 그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역사연구소와 도서관, 박물관을 다니며 역사소설 창작을 위해 근 10여 년 넘게 엄청난 자료를 수집해왔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의 배경이 된 전주를 상세히 그리기 위해 전주의 마을, 숲, 정자, 소나무까지 세심히 지도 작업을 했다. 조선 말기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이 겨울에 콩잎, 팥잎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생동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밤늦게까지 아내와 함께 시골에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했다.


박태원은 병 치료를 하면서 아내의 도움으로 구술로 집필을 이어간다. 그 과정에 너무 고생한 아내 역시 청각을 잃게 된다. 그의 건강 회복과 집필을 위해 김일성 주석과 조선노동당은 사향이 담긴 한약을 보내기도 했고, 때마다 격려의 훈장과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박태원은 건강이 악화되어 도저히 갑오농민전쟁 3부를 집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내의 손바닥에 글자를 한자씩 그려 소설의 구성과 형상 의도를 전달했다. 남편의 당부를 받고 당시 74살의 아내는 2년 동안 국가적 도움으로 소설을 창작하여 1986년 원고를 완성하게 된다.


그의 수양딸 정태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갑오농민전쟁> 제3부에는 박태원, 권영희 두 이름이 씌여져있다. 그러나 나는 1, 2부의 박태원이라는 이름 밑에서 또 하나의 다른 이름 권영희를 본다. 엄마는 아버지의 절반이였다.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부부란 가위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서로 필요로 하고 의지한다는 것의 참의미를 알았다... 그들은 둘이였지만 하나의 결정체였다.”<도서 <운명의 선택 1>, 김성희, 평양출판사, 2012>


꺼지지 않는 열정을 가진 작가 박태원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은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인민들에 대한 진실한 화폭’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북한 문학사 최고의 역사소설로 자리 잡고 있다.


그는 1986년 78세로 생을 마무리했다. 북한의 작가동맹은 ‘박태원 동지는 서울에서 창작생활을 하다가 공화국 북반부로 들어와 우리 당의 문예사상을 높이 받들고 소설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자기의 재능과 정열을 다 바쳤다’며 그를 추모했다. 박태원의 묘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두 눈이 앞을 못 본 지 20여 년이 되도록 집필을 하며, 몸은 비록 자리에 누워있으나 마음은 끝까지 활기를 잃지 않았던 소설가 박태원.


죽은 나무에 꽃을 피운다는 전설과 같은 의지를 보여준 그 열정의 원천은 역사가 준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성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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