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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an 19. 2020

조국에 대한 찬가를 작곡한 박한규

격조 높고 특색있는 선율의 작곡가

모든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 조국 노래한 예술가들. 그들은 여전히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조국에 대한 찬가를 작곡한 대표적인 작곡가는 스메타나와 시벨리우스를 손꼽을 수 있다.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는 교향곡 ‘나의 조국’으로 체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신음하던 체코인들에게 자주정신을 불러일으켰다.   


‘핀란디아’는 시벨리우스의 대표작으로, 압제 아래 금지곡이 되기도 한 핀란드의 애국 가요다. 핀란드는 200여 년 동안 스웨덴의 식민지였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었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차트를 점령하고, 손흥민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최장거리 단독드리블을 성공한 요즘, 문화와 예술의 성장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조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북한에도 조국에 대한 찬가를 지어 사람들의 추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작곡가가 있다.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를 작곡한 월북 예술가 박한규가 그 주인공이다.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  


조국에 대한 노래는 아무나 작곡할 수 없다. 또한 만든다고 해서 널리 불리기도 어렵다.        


조국에 대한 노래는 시대상이 반영된 거울이며, 걸어온 역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의 표현이다. 동시에 국가를 이루는 다수의 공통된 감정이 응축되고 공감될 때 조국에 대한 노래는 퍼져나갈 수 있다.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김우철이 쓴 가사에 박한규가 곡을 붙인 노래다. 박한규는 1948년 9월 당시 국립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연주가로 일하고 있었다. 이 노래에는 격동과 환희가 담긴 가사에 어울리는 매우 호소력 있는 선율이 담겨져 있다.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

백두산천지에서 제주도 끝까지 

새 기발 높이여 삼천만은 나섰다 

산천도 노래하라 이날의 감격을 

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나라다 

아 - 자유조선 인민공화국 

해와 별 빛나라 조국의 앞길에


인민의 줄기찬 힘 하나로 뭉치여

새 나라 헌법을 로력으로 세웠다

초목도 나붓기라 이날의 승리를

조선은 영원한 인민의 나라다

아 - 자유조선 인민공화국

해와 별 빛나라 조국의 앞길에      


북한 매체 내나라에 따르면 “가요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그의 음악적열정의 산물인 동시에 조국에 드리는 아들의 맹세였다”며 “공화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축복, 그를 위한 헌신의 감정이 하나로 응축되어 밝고 희망차면서도 폭넓고 장중한 선율을 낳았던 것”이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이 노래에 대해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가사도 좋고 곡도 잘되었습니다. 내가.. 참가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멀지 않아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게 되는데 그 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노래를 하나 창작하라는 과업을 주었더니 정말 훌륭한 노래를 지었습니다.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앞으로 수천 년이 가도 우리 당의 력사와 더불어 영원히 추억할 노래입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결국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 일에 연주되게 되었고, 국가 수립 전에 작곡된 국가에 대한 찬가라는 의미를 지닌 특별한 노래로 자리 잡게 된다.


박한규의 두 번째 대표곡은 1956년 작곡한 송가 <김일성 원수께 드리는 노래>를 꼽을 수 있다. 이 노래는 재담 <혁명의 노래, 승리의 노래>로 각색되고, 그 창작 과정이 영화 <옛 경위대원>으로 제작될 만큼 북한에서 높이 평가받는 노래다.


당시는 김일성 주석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종파 사건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한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항일투사 출신 간부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발언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김일성 주석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북한의 정권 안정에 이바지했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신동


박한규는 1945년 해방 전 고향이라는 말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는 1919년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태어난 지 9달 만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 낯선 중국 길림성 용정으로 이주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18살에 탄광과 부두에서 노역을 하면서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가 가진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그를 일본으로 이끌었다. 

박한규는 1941년 일본 사립음악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민족적 멸시와 학비 난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일본 학교교무부장이 한규에게 “왜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가?”고 따지고 들었다. 분노가 솟아오른 그는 주저 없이 “나의 이름은 조선의 한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하여 더는 학교에 갈수 없었다. <북, "작곡가 박한규 생일 100돌 기념음악회 진행",  자주시보, 2019.03.04>


결국 그는 중국으로 되돌아와 일제 강제징용의 노역을 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작곡가 박한규


해방 후 귀국한 박한규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1947년 문화 선전성 문화 예술부원을 지내다가 국립교향악단에 입단했다. 그는 이후 1950년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협주단, 1951년 조선인민군 협주단, 1972년부터 1984년 조선인민군 문예창작실에서 활동하였다. <송방송, 『한겨레 음악인 대사전』, 보고사, 2012>   


전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장 김득청은 “박한규 선생은 창작적 개성이 뚜렷한 그런 작곡가라고 누구나 말하곤 했습니다. 선생이 작곡한 노래들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선 많은 노래들이 첫 시작에서 높은음에서 격조 높이 때는 것이라든가, 그리고 특색 있는 선율을 인상깊에 여러번 반복하는 것, 그 밖에 독특한 선율들은 선생의 창작적 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박한규의 노래를 평했다.


김득청은 이와 같은 창작적 개성은 언제나 인민들 속에서 병사들 속에서 생활하면서 창작 생활을 해온데서 발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은 힘 있는 리듬, 폭발적인 울림, 서정적 선율이라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박한규 생일 100돌 기념 음악회


2019년 3월 2일 동평양대극장에서는 작곡가 박한규 생일 100돌 기념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음악회에는 박한규의 유가족과 그가 작곡한 노래를 부른 가수, 영화인과 예술인과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이 음악회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안하여 개최되었다. 


이 날 연주된 “합창 ‘오 눈보라 눈보라’, 여성독창 ‘승리하고 돌아오라’, 여성독창과 남성방창 ‘아무도 몰라’, 남성소합창 ‘해안포병의 노래’, 남성중창 ‘우리 중대에 신입병사 왔네’, ‘손풍금수 왔네’ 등의 곡목들은 혁명선열들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우리 인민들과 병사들의 숭고한 조국애와 혁명적 낭만을 장중하고 기백 있으면서도 낙천적으로 형상한 것으로 하여 관람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의 오늘, 작곡가 박한규 생일 100돐 기념음악회 , 2019.3.2> 


작곡가 박한규 생일 100돌 기념 음악회


박한규는 북한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음악가다. 그는 1992년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그는 1961년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국가훈장 1급 2개와 노력훈장 1개, 국가훈장 2급 4개를 수상하였다.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자신의 조국에 대한 찬가와 지도자에 대한 송가를 작곡한 작곡가 박한규. 그가 북한 국적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우리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결중인 남북관계 현실과 북한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로 그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물리적, 정서적 제약이 심하다. 


그의 천재성이 담은 선율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그 선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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