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촌(民村) 이기영, 고향을 그리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큰 혹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을 하도 많이 써서 딱딱하게 굳은 자죽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얼마나 이악스럽게 자기 일에 집중했는가를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카프 대표작가 이기영(하), 위클리경향 818호, 2009.03.31.>
민촌 이기영(李箕永, 1895~1984), 카프 작가로 이름 떨치다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진 대문호. 그의 손을 잡아보고 쓴 후일담은 민촌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1960년 장편소설 <두만강>으로 북한에서 인민 작가상을 받았다. <두만강>은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아 레닌문학상을 수상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이기영의 딸 이을남은 평양방송을 통해 <두만강>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이기영은 <두만강> 3부를 쓸 때 7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기영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약 두 달에 걸쳐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백두산 천지 등을 답사하고 본격적인 작품 창작에 들어갔다. <정연식, 北소설 '두만강'에 얽힌 비화, 연합뉴스, 2004.11.25.>
당시 김일성 주석은 고령인 이기영의 답사준비부터 승용차와 운전사 제공까지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또한 <두만강> 1부를 높이 평가하며 소설을 각색, 영화로도 제작하도록 했다.
이기영은 한설야, 조명희와 함께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자였다.
그는 1922년 일본유학 시절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 세이고쿠(正則) 영어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탐독하고 고리키 작품에 빠져들었다.
“참으로 쏘비에뜨 문학은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 바꿔놓게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계급사회의 모순을 분명히 해명하지는 못하였다. 이 세상이 옳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과학적·이론적으로 그 원인을 해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운애가 낀 먼 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유심론의 너울이 가리어서 나의 심안에 계급사회의 윤곽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쏘비에뜨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작품과 사회주의 서적을 읽어감에 따라서 나는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카프 대표작가 민촌 이기영(상), 위클리경향 817호, 2009.03.24.>
사회주의에 눈을 뜬 이기영은 새로운 집필 방향을 모색한다. 하지만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만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아직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경향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농촌의 살아있는 현실과 자각한 농민이 등장했다. 그는 1931년 카프의 1차 검거사건 이후 유물 변증법적 창작방법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물론 방향전환 당시 고충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많은 동지가 그때마다 우수한 이론을 소개 해석하고 비판함에 따라서 나 자신도 맞장구를 쳐왔지만 다시 창작의 붓을 들고 생각해 볼 때는 도무지 어떻게 써야만 할지 버젓한 슬로건을 놓고도 마치 일모도궁(日暮途窮: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막혀있다)한 여객과 같이 향방을 모르고 있었다. 참으로 어떻게 써야만 목적 의식적이요, 변증법적 창작방법이라?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만 이 슬로건들에게 가위를 눌리고 말았던 것 같다.” <이기영, 「사회적 경험과 수완」, 조선일보, 1934. 1. 25.>
여러 작품을 써나가면서 이윽고 이기영은 1933년 농민문학의 새로운 기념비적 작품 <고향>을 발표했다. 찌는듯한 여름 40일 동안 고향 성불사(成佛寺)에서 집필하기 시작한 <고향>은 그해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그러나 다음 해 8월 제2차 카프 사건이 터지면서 이기영은 전주형무소로 끌러가 연재는 중단되고 만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기영은 1956년 여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선전선동 활동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통해 그의 사회주의 창작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는 남조선 일대에서 광부, 막노동꾼, 머슴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도처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굶주린 형편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도할 때마다 치솟는 민족적 격분을 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비참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고민했지요. 그건 소설이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제 소설의 내용은 인민의 터전이었고, 인민이 사는 삶의 전형을 순간순간 잘 포착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소설을 쓰면서 선전선동이란 인민이 사는 터전에 맞게 창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겁니다.”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카프 대표작가 이기영(하), 위클리경향 818호, 2009.03.31.>
제1, 2차 카프 검거사건 이후 1935년 6월 카프의 문학부 책임자 김기진이 카프 해산계에 서명하면서 카프는 문을 닫았다. 카프에 소속되었던 수많은 작가 중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단 세 사람밖에 없었다. 이기영, 한설야, 안함광. 이 세 명만 끝까지 지조를 지켜 싸웠다.
이기영의 지조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상당히 인상 깊게 회고하고 있다.
“요시찰인으로 등록된 후의 그의 살림살이가 몹시 궁색했다고 합니다. 어찌나 돈에 쪼들렸던지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비가 없어 그 애의 시신을 옆에 두고 <돈>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고 합니다.”<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4 민족의 얼>
이기영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1944년 이르러 경찰의 눈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금강산 밑 산골로 은둔해야 했다. 김일성 주석이 해방 후 어떻게 옥중 고초도 견디고 창씨개명도 이겨냈는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류관순과 같은 17살 내기 처녀도 꽃다운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키는데 나 같은 문인이 절개를 굽히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간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도쿄 바닥에서 왜놈들이 죽창과 일본도와 쇠갈구리로 조선사람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을 보고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그놈들과는 꼭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방 후 이기영은 한설야와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결성하고, 1945년 11월 월북을 한다. 북측에서 써낸 대표작으로는 1948년 <땅>, 1954년 <두만강1>, 1957년 <두만강2>, 1961년 <두만강3>, 1967년 <조국>, 1972년 <역사의 새벽길> 등 생의 마지막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이기영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 문학예술 동맹 위원장을 종신으로 역임한다. 그만큼 북한 문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하며 노력훈장과 인민예술가 칭호 및 국기훈장 1급을 받고, 1984년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4년 8월 어느 날 이기영의 사망을 애석해하며 "광복 후 오늘까지 우리나라 문학예술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우리 당과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작가로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했다"고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정연식, 北소설 '두만강'에 얽힌 비화, 연합뉴스, 2004.11.25.>
이기영은 농민 작가다. 그의 호 민촌은 ‘농촌 사람’ 혹은 ‘평민’이라는 뜻이다. 그의 단편집 <민촌>이 유명해지자 벽초 홍명희가 지어준 호라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고향인 농촌을 사랑했다. 그의 고향, 가난했던 천안 유량동 시절 경험은 그의 대표작인 <고향> <두만강>에 진하게 배어있다.
천안에는 그와 헤어진 가족이 아직 살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손자 이동열씨는 유명한 할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자라왔다. 고등학교 때 겨우 진실을 알았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안 하셨지. 할아버지가 유명한 소설가이고 월북작가라는 것도 고등학교 때 형님을 통해 알았네... 둘째 형님이 대학교 때 할아버지의 북한 소설 두 권을 헌책방에서 구해왔다가 아버지한테 불호령이 떨어지게 혼났지. 또 다른 형님은 육사에 합격했지만 신원 조회에서 낙방했지. 이유야 뻔하지 뭐... 자랄 때 보면 아버지가 북한 방송을 몰래 들으셔. 한동안은 아버지가 간첩이 아닌가도 생각했지. 나중에 보니 할아버지 소식이 궁금해 그랬던 것 같애."<윤평호, 월북작가 이기영 고향 천안에서 복권하나, 천안신문 338호, 2005.05.28.>
참 지난 70년은 고향에 다시 가볼 수도 없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길도 없이 흘러온 세월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민촌 이기영이 잡고 싶었을 그 갈라진 세월의 흔적을 잠시라도 간접적으로 더듬을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2018년 11월, 민촌의 아들 리종혁(83)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경기도에 방문을 한 것이다. 이재명 지사는 오찬 전에 특별히 남측에서 출판된 아버지 이기영의 소설 ‘고향’을 아들 리종혁 부위원장에게 선물했다.
비공개 오찬에서 리종혁 부위원장은 뜻밖의 선물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눈에 띄게 기뻐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종혁 부위원장은 오찬 중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내용을 몇 번씩이나 들춰보는 등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동규, 이재명이 리종혁에게 선물한 ‘아버지 흔적’ CBS노컷뉴스 2018.11.17.>
70년 세월을 건너 찾아온 아버지의 고향 땅에서 만난 아버지의 책. 83세의 리종혁 부위원장은 "많이 고맙소…"라며 짧지만 진한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그는 비록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만 민촌의 작품은 통일을 한 걸음 당겨올 큰 울림이 되어 퍼져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