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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Aug 28. 2020

의지와 열정으로 무대를 사로잡은 인민배우, 황철

북한 첫 인민배우 탄생 스토리

30년대 스타 배우 황철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옛날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술만 취하면 불렀던 친숙한 노래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1930년대 개화기 시절 작품의 원조 스타 배우 황철(黃澈 1912.1.12~1961.6.8). 그는 당시 조선 최고의 배우고 손꼽혔다. 하지만 월북 후 그에 대한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오빠의 학업을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그 신분 때문에 결혼 후 버림을 받고 살인을 저질러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는 내용이다. 당대 원로 연극인들은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당시 주인공 배우 황철을 기억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930년대 신문광고


“황철이가 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검사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같은가 하나 윈가 그래... 황철이가 가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자기 누이동생이 기생질해서 자기를 이 공불 시켰다. 그 생각하니까 가슴이 그냥 찢어지는 것 같아서 이렇게 어디 한쪽을 이렇게 보면서 한숨을 "허유" 이렇게 쉬고 있는데. 이거 그 유덕형이 어머니 얘기야. 그 눈이 마주쳤데. 응 그 우연히 마주친 거야. 마주쳐서 저기서 "허" 하는데 이 호흡 입김이 자기에게 오는 것처럼 (숨을 빨아들이며) "헉" 이렇게 되드래는거야. 이게 연극이래는 거야... 이게 이게 신파의 테크닉이야. 아유 멋있는 사람들이야.

<출처: 이원경 구술, 백현미 채록, 『200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19: 이원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나도 소위 신파고 뭐고 한국의 연극배우를 통틀어서 황철이가 제일인 거 같아요. 그만한 배우가 안 나왔다고 봐요. 그래서 참 재주가 있어요. 그리고 그… 하여간 코믹한 것도 잘하고 사투리도 잘하고 하여간 참 재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이 발음이 아주 저음이 멋있어요. 저음이 덜덜덜덜, 아주 리드미컬하고, 그 대사에 아주 묘미가 있고. 그렇게 잘해요. 자연스럽게 잘합니다”

<김동원 구술, 김성희 채록, 『2003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 김동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탁월한 목소리의 주인공     


황철의 인기 비결은 목소리에 있었다. 그는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체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천하제일이었다. 황철은 중저음에서 나오는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특색 있게 대사를 치며 좌중을 압도했다.     


황철을 배우로 발탁한 변기종은 "한 달 동안 연극을 계속해도 목이 쉬지 않는 천부적 배우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연극쟁이"라고 그를 평했다. <한상언, 천부적 재능의 조선 최고의 스타 황철, [한국영화스타 8-①] 영화배우 황철, 오마이뉴스, 2007.01.29>     


인민배우 황 철 (1957년)


황철은 유랑극단에서 무대장치 조수 겸 단역배우로 연기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주인공이 체포된 우연한 기회로 조선연극사의 주연 자리를 맡게 되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차츰 인정받기 시작한 황철의 연기는 임선규가 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절정에 이른다. 주로 활동했던 동양극장이 문을 닫자 황철은 극단 ‘아랑’을 창립한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시, 그는 일제총독부 강요 아래 굴욕적인 연기 생활을 해야 했다.     


해방과 월북     


해방은 연극인 모두를 들끓게 했다. 황철은 8·15 광복이 되자 바로 9월에 극작가 함세덕 등과 함께 낙랑극회를 조직했다. 낙랑극회는 창단공연으로 독일 극작가 쉴러의 작품을 번안한 <산적>을 올렸다. 그러나 해외에서 신극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신파극의 인기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당시 연극계에서는 신파극이라는 낮은 단계의 통속적 연극과 이론과 체계를 갖춘 고차원적 연극인 신극을 구분하고자 했다. 황철은 당대 대중극 배우로서 인기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 역할로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신극보다 열등 장르인 신파극 배우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조영복,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돌베게 2002, 223p>      


또한, 연극계의 시선은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 군정은 일제강점기 검열제도를 유지하고 입장료 세금도 대폭 인상했다. 그에 비해 38도선 이북은 배우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배경으로 당시 엄청나게 많은 예술인이 월북했으며 평양 거리는 예술가들로 넘쳐났다.     


황철은 1946년 11월, 남로당 결성대회에서 연극인 대표로 축사를 하고, 12월에 좌익계열 조선연극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은 남로당을 불법화하고 좌익계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그 때문에 황철은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고, 지방 순회공연에서 우익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황 철의 가족 사진


그러던 1948년 4월, 황철은 김일성 주석의 초청장을 받고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고자 평양으로 떠난다. 황철은 월북을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저 삼팔선이 무슨 국경선이라도 되는 줄 아시오?”라고 안심시키며 단벌로 삼팔선을 넘었다. <김영무, 동양극장의 연극인들, 동문선 1998년, 212p>      


그는 연석회의 후 인민을 위한 무대예술 창조사업을 하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평양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평양에서 살 집까지 수여받고 가족들에게 집을 세주고 북으로 건너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불굴의 의지     


부푼 마음으로 평양에 있는 국립극장에 서게 된 황철은 예상된 난관에 부딪혔다. 즉흥적인 대사나 감정적 연기 위주의 신파 연기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기 체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미친 사람처럼 연기훈련에 열중했다.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실력을 따라잡은 황철은 중편, 장편 극의 주인공을 맡기 시작했다. 이윽고 1949년 해방 4주년 기념 전국 문학예술축전에서 연기 부분 1등 상을 받게 된다. 모두 그를 지독한 의지와 열정의 예술가라고 불렀다.     


황철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대를 따라 서울에 나가 전선 위문 공연을 진행했다. 평택 공연을 마치고 밤 9시경에 천안으로 이동하는 도중 공연대 위로 폭격기가 날아들었다. 불행하게도 폭탄 파편은 엎드려있던 황철의 오른팔을 빼앗아갔다. 연기자로서는 정말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황철은 비록 불구가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보다 더 훌륭히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왼팔 훈련에 매진했다. 글씨 쓰기, 바느질부터 시작해 초물모자(옥수수 껍질로 만든 세공품) 만드는 법을 배우며 왼손을 숙련했다. 그는 왼손 하나로 수를 놓아 세 마리 토끼가 정신없이 풀을 뜯고 있는 모양의 가방을 만들 정도로 고급 기술을 습득했다. 동시에 의상과 소도구를 이용하여 오른쪽 의수 부위를 자연스럽게 가려 전혀 어색하지 않게 연기를 해나갔다.     


속이 시원해지는 명배우     


황철은 예술영화 <춘향전>의 변학도 역과 연극 <이순신 장군>에서 이순신 역을 의수를 낀 채로 완벽히 수행했다. 북한은 1952년 그에게 첫 공훈배우 칭호를 내렸으며, 1955년 8월에는 예술인 중 처음으로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했다.     


연극 <이순신 장군> 중 이순신 역을 맡은 황 철


8·15 광복 10주년 경축연회에 참석한 황철을 만난 김일성 주석은 “황철 동무가 왔구만, 우리 명배우가 왔어, 나는 동무의 얼굴만 봐도 속이 시원하다”라며 그의 연기를 높이 평가했다. <리경수, 운명의 선택 2,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배우 황철), 평양출판사 2012>     


황철은 저술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대표적인 논평으로 <새로운 연기창조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1955.6), <배우와 기본훈련>(1957.11), <연극의 질 제고와 진실성 문제>(1959. 11), <배우와 기교>(1960.7) 등을 발표했다. 또한, 1959년 <무대화술> <분장론> 등 자신이 정립한 연기이론을 집대성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1955년부터 국립연극극장 총장을 맡았으며 1958년부터는 교육 문화성 부상까지 겸임하며 행정 사업을 맡아봤다. 또한, 평양연극영화대학 겸임교원으로 후대 양성도 해나갔다. 1957년에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면서 정치 활동도 왕성하게 펼쳤다. 1960년대 북한의 전후 복구 운동인 천리마 운동이 본격화된 농촌 현실을 그린 작품 <붉은 선동원>은 인민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불꽃처럼 타오른 생애     


황철은 1961년 일제강점기 항일유격대의 활동을 회상한 <돈화의 수림 속에서>를 쓰다가 불치의 병을 얻게 된다.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대본 작업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도 꼭 이 연극을 완성해 달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대본을 안고 숨을 거두었다. 50세도 안 된 향년 49세의 아까운 나이었다.


황철의 부고는 로동신문에 크게 났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국립극장에서 엄청난 인파와 함께 진행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의 연극예술발전에 이바지한 황철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는 한 팔이 없었으나 연기를 아주 잘 하였다고, 화술도 독특하였다고, 재능있고 훌륭한 배우였다’라고 추억했다. <리경수, 운명의 선택 2,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배우 황철), 평양출판사 2012>     


황철은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6년 6월 26일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황철의 묘비 오른쪽에서부터 차남 황준영, 장남 황태영, 3남 황세영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조선 인민이 낳은 천재적 예술가 인민배우 황철 동지는 그의 고귀한 예술창조로 하여 인민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당의 붉은 전사로 찬란한 조선예술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친 그대 여기에 고이 잠들다. 그대가 이룬 불멸의 업적과 공훈은 후세에도 길이 영생하리라.”<푸른빛, 북한 제1호 인민배우 황철과 그 연극 세계, 네이버 블로그, 2006. 5. 19.>      


1930년대 최고의 배우 황철, 그의 탁월한 목소리를 한 번쯤 들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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