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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Mar 24. 2023

하노이의 그 여자 그 남자 (2/2)

한발 안으로. 한발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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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그 여자 그 남자 1 : 첫 만남 ]



(...이어서)

남자는 하노이를 떠난 여자의 여행 소식을 가끔씩 메일로 확인하며 하노이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여유를 가지게 된 5년 차 베트남 생활을 돌아봤다. 그 사이 여자는 라오스, 태국을 지나 미얀마에 도착했다. 2012년의 미얀마는 민주화 개혁이 시작된 이후 4월의 보궐선거에서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아웅산 수치가 이제 막 야당 당수가 된,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양곤 시내 곳곳의 전광판에는 ‘이제 외국이 우리를 보고 있으니 길거리에 침을 뱉지 말라’는 캠페인 영상이 계속 틀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저 평화로운 미얀마의 이곳저곳을 여행을 한 뒤 다시 양곤으로 돌아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명상센터에 들어갔다. 센터의 규율에 따라 여성 수행자는 비구 스님들과 함께 여성들만이 출입 가능한 공간에서 명상을 하고 잠을 잤다. 맛있기로 소문난 아이스크림이 후식으로 나왔던 특별한 식사와 외국인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 큰스님의 즉문즉설이 열렸던 것을 제외하곤 명상센터에서의 일과는 늘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이 센터에 온 지 6개월이 넘었다는 한국인 비구 스님을 숙소 복도에서 만났다. 수행 중에는 원칙적으로는 묵언을 해야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 수행자가 반가웠는지 비구 스님이 작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이것저것 신상을 묻는 스님의 물음에 여자는 하노이에 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냈고, 고민을 듣던 스님이 답했다.


“남편과 자식이 있으면 고뇌가 많아지죠. 나처럼 가진 것 없이 편히 살아요."


인터넷도 전화도 할 수 없는 명상센터였지만, 여자는 스님을 따라 몰래 근처의 피시방에 갔다. 그리고 명상센터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남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어제 만난 비구 스님이 혼자 살라고 했다’는 여자의 메일을 받은 남자는 진심으로 놀랬다. 여자가 당장이라도 머리를 밀고 절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 같았다. 남자는 바로 말레이시아의 랑카위 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남자의 걱정과는 달리 여자는 비자를 핑계로 2주 만에 명상센터를 나왔고, 귀로여행의 마지막으로 랑카위 섬에 들렀다. 한 달 반 만에 여자를 다시 만난 남자는 언제 또 비구가 된다고 할지, 수녀가 된다고 할지도 모르는 이 엉뚱한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도 비구 스님의 말에 공감은 했지만, 만약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면 이 우직한 남자와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던 여자는 방랑을 멈추고 싶을 때였고, 일터가 전부였던 남자에겐 변화와 자극이 필요한 때였다. 둘에게 남은 건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네가 올지, 내가 갈지' 정하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확인 한 둘은 각각 서울과 하노이로 돌아갔다.


2012년,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던 미얀마. 양곤에서 띠보(Hsipaw)로 가는 기차 안에서.




서울과 하노이를 오가는 2년간의 장거리 연애의 끝, 결국 여자가 ‘내가 갈게”라고 선언했다. 여자는 베트남에 돌아가는 것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두려움도 없었다. 단지 한국에 사는 것보다 그게 어디든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이 자신에게 더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가는 거였다. 산다는 것은 언제든 싫어질 때 떠나면 되는 것과는 달리 싫은 게 생겨도 애써 버티며 정 붙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무 살이 된 이후로 그렇게 이곳저곳을 싸돌아 다닐 때, ‘좋은 놈 하나 건져오라’ 던 여자의 엄마는 정작 여자가 어렵사리 택한 그놈을 극구 반대했다. 그간 무수한 외박에도, 이런저런 연애 사에도, 기약 없는 여행에도, 잦은 퇴사와 그 어떤 결정에도 아무 말하지 않고 딸을 내버려 둔 엄마였다. 그러나 기약 없이 누비다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던 딸이 이번에는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인지, 딸이 ‘남자’ 때문에 떠난다는 게 싫은 건지, 귀한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딸마저 떠난다고 하는 게 싫은 건지 엄마는 그 ‘놈’을 정말 모질게도 반대했다. 여자는 후회가 됐다. 엄마에게 ‘나 남자 생겼어’라고 먼저 말한 뒤, ‘다시 베트남에 갈게’라고 통보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베트남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좋은 놈 하나 건졌어’라고 안내하는 순서로 말했으면 좀 나았을까?


딸을 누구한테 내놔도 아깝다고 느끼는 여자 엄마의 반대는 마치 아침드라마의 장면들 같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둘 사이를 방해하려는 엄마에게 여자는 더 크게 반발했지만, 남자는 그 모진 수모를 다 견뎌냈다. 물론 남자 역시 그 반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묵묵히 기다리다 보면 해결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묵묵히 듣고 잊는 건 남자가 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만약 남자의 어머니가 나에게 이 반의 반이라도 했다면 나는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 텐데….’ 여자는 ‘작은 일에도 쉽게 끓어오르고, 시도 때도 없이 때려치우던’ 자신에게 이 남자는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고 더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잠시 들어온 남자와 한국에서 하던 일을 정리한 여자는 양쪽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결국 어미는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하노이 한인타운의 기숙사에서 나온 남자는 월세 500달러짜리 텅 빈 아파트를 구했다. 여자는 옷가지와 개인 물품을 넣은 18킬로짜리 배낭을 메고, 엄마가 챙겨준 냄비세트와 두툼한 이불 등을 담은 박스 하나를 들고 하노이로 돌아왔다. ‘저러다 혼자 골방에서 외로이 늙어갈까’ 걱정하던 남자의 지인들이 기뻐하며 냉장고와 세탁기를 선물해 줬다. 그리고 나무 침대 하나, 작은 천 소파 하나, 행거 두 개도 집 안에 들였다. 아파트 근처의 슈퍼마켓에 가서 밥그릇 두 개, 국그릇 두 개, 접시 두 개, 수저 한 세트, 프라이팬 하나, 수세미 하나, 수건 한 묶음, 옷걸이 두 묶음을 샀다. 둘은 하노이의 텅 빈 아파트에서 ‘언제든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삶’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함께 한 하노이 생활의 일 년이 지났고 여자와 남자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인 듯, 부모님의 원망과 걱정을 조금 달래 드리고자 한국에 가서 후다닥 결혼식을 치러버렸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본가에서 하룻밤씩을 보내고, 한겨울에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은 채 각자의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갔다. 남자의 첫번째 여행용 배낭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달랑 비행기표만 구한 채, 스리랑카로 신혼여행을 갔다. 둘은 경유지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아무 계획도 정보도 없이 도착한 스리랑카에선 만원 버스에 끼어 타야 했고, 기차 좌석을 얻기 위해선 배낭을 메고 달리기를 해야만 했지만 여행 경험이 수두룩한 눈치 빠른 여자가 있었다. 비가 온 고산지역 차 밭에서는 있는 옷을 몽땅 다 껴 입고도 추워서 시장에서 외투를 사 입어야 했고, 잘 마르지 않는 날씨에 숙소에선 매번 손빨래를 해야 했지만 손빨래를 야무지게 잘하는 부지런한 남자가 있었다.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 둘은 처음으로 함께 스쿠버 다이빙도 했다. 그러나 10년 전 있었던 쓰나미로 마을 전체가 쓸려가 버렸었기에 다이빙샵에 남아있는 다이빙 장비들도 모두 낡은 것뿐이었다. 심지어 바다 위에서 다이빙을 하러 이동하던 작은 배의 모터마저 고장이 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초보 다이버인 남자에겐 듬직한 다이브 마스터 여자가 있었다. 이런 여행이 낯선 남자에게도, 누군가와 내내 함께하는 여행이 처음인 여자에게도 스리랑카는 특별한 곳이 되었다. 둘은 방콕을 경유해서 다시 하노이로 돌아왔다.

스리랑카 갈레(Galle)




누군가를 책임지는 삶에 대해 부담을 가졌던 여자는 아이 없이 지금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다. 그리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않기에 둘은 모두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여자는 ‘아이를 빨리 낳아서 기른 뒤, 일찍이 자유를 되찾겠다’고 선언했고, 하노이에서 토끼 같은 아들, ‘만두’를 낳았다. 어린 만두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남자도 잠을 쪼개가며 열심히 육아를 도왔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의 힘듦을 공감하고 일을 덜어준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일이 수십 가지였던 여자가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독 잔병치레가 잦았던 아이가 조금 자라고 나서 여자는 그간 적어두었던 ‘하고 싶은 것들 목록’을 들여다봤다. 물론 아이가 생기기 이전과 같은 자유는 아니었지만 남자의 묵묵한 내조를 뒤로하고 현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 것 타협하며 해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만두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엄마의 역할이 실은 ‘엄청나게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살림은 몰아서 하고, 8년째 한결같이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지만, 수십 개를 나열하던 여자의 꿈 안에는 이제 스스로 만든 가족의 자리가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남자의 삶도 180도 달라졌다. 남자는 뭐든 잘 흡수하는 '흰 도화지' 같은 사람이었고, 여자가 그 도화지 위에 선명하게 그리는 모든 이야기들을 쑥쑥 흡수했다. 남자는 여자가 없었다면 평생 경험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며 즐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가족과의 시간을 우선으로 만들기 위해 비교적 여유가 많은 작은 회사로 옮겼고, 가고 싶지 않은 회식에 불려 다니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발적 외톨이가 되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김치를 직접 담그고, 요리를 했다. 주말마다 차에 자전거를 싣고 가족을 태우고 공기 좋은 초록을 찾아 떠나고, 여행지에 가선 아이와 아내를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무뚝뚝했던 남자는 여자가 공유하는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어릴 적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감정표현을 새롭게 배우고 익혔다. 남자는 토끼 같은 아들과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놀아주었고, 아이가 잠이 든 어두운 밤에서야 운동을 하거나 잔업을 마무리했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살게 해주고자 했다. 여행지에 가서 여자가 ‘여기서 게스트하우스 하면 어떨까’는 상상을 하면 남자는 곧바로 땅 값과 건물 수리 견적 계산해서 알려주었다. 그러면 여자는 주변에 아이가 갈 수 있는 학교를 알아보고 이곳에서 벌일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남자도 옆에서 웃었다.


밖으로만 내딛던 여자는 이제 안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빠르게만 달리던 남자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둘은 그렇게 방향과 속도를 맞추며 닮아가고 있다. 언제 어디든 떠날 꿈을 꾸며, 여전히 하노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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