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강인한 그녀, '지영'에게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나. ‘나 이 사람 알아!’ ‘나 이 사람이랑 친한데?’ 하며 자랑하고 싶은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 사람. ‘지영’은 나에게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나보다 베트남을 먼저 경험한 선배였다.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같은 단체의 같은 지부에 있었지만 나는 그녀와 현장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았다. 그러다 귀국 후 ‘COVIL(코빌)’이라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의 모임에서 처음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단체의 같은 베트남 현장에서 활동했다는 끈과 함께 ‘코빌러’라는 연대를 가지며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그녀는 한국에서, 나는 베트남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우린 50일 차로 엄마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엄마가 된 몇 명의 코빌러들과 함께 새로운 카톡방이 만들어졌다. 그 카톡방에서 우린 육아의 고충과 함께 팁을 나눴고, 동시에 엄마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역할을 찾으려 애썼다. 우린 엄마이자, 여자이자, 활동가인 서로의 삶을 그저 바라봐주고 응원해 주게 되었다. 고민과 위로와 지지가 쌓이고 쌓이며 뭔지 모를 끈끈한 동지애가 피어났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시간을 내서 그 동지들을 꼭 만났고, 덕분에 아이들은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의 서로를 기억하며 함께 자랐다. 시간으로 보면 함께 자랐다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엄마들이 서로에게 소중한 인연이 되어가듯 아이들도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그리워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이가 만 4살이 될 무렵, 나는 아이와 함께 호이안 한달살이를 기획했다. 그리고 문득 지영을 떠올렸다. 국제개발협력 단체에 이어 평화 단체에서 일하다 마침 육아휴직 중이던 그녀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 부딪히며 함께 여행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적어도 이 사람과는 서로 배려하며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갈등이 있더라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이들과 함께여도 왁자지껄한 여행이 아니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지영이 베트남을 얼마나 애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의 가벼운 제안에 지영은 무려 11일의 일정을 만들어 딸아이의 손을 잡고 호이안으로 단숨에 날아왔다. 그리고 우린 참 괜찮은 여행을 해냈다.
그녀의 여행 내공은 나의 부족함을 모두 채우고도 남았고, 고맙게도 동갑내기 두 아이는 꽤나 잘 맞는 여행 파트너가 되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수영을 했고, 매일 다른 음식을 먹어봤으며, 매일 다른 일과를 만들었다. 여러 군데의 바다를 찾아가 놀았고, 구시가지에서 보통의 여행자들 사이에 끼어있기도 했다. 생태 학교에 찾아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고, 소 똥 널브러진 숙소 뒤 논밭 길을 산책했다. 우연히 찾은 텅 빈 공터에서 맨발로 달리고 구르며 놀았고, 유모차를 끌고 땀 뻘뻘 흘리며 시골길 3km를 걷기도 했다. 유모차에서 나란히 잠이 든 아이들 덕분에 좋아하는 찻집에서 무려 세 시간의 자유를 만끽한 건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나 혼자였다면 쉽사리 시도하지 않았을 것들을 기꺼이 다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영 덕분이었다. 우린 비슷한 면도 많았다. 둘 다 술을 잘 못 마시는 것, 음식을 먹을 만큼만 적게 주문하고 깨끗이 비워야 하는 습관, 최소한의 엄격한 제한 아래서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채주려 노력하는 양육 태도,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낯선 문화에 대한 시선 등. 함께여서 배울 것들이 더 많은 여행이었다. 문득 무엇이 되고자, 혹은 무엇을 얻고자 바득바득 살지 않고 이렇게 평화롭게 하루하루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영과 나는 이런 곳에서 같이 아이를 키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관광객이 많은 해변을 찾아간 날이었다. 몇 시간째 모래놀이에 여념인 아이들과 함께 있었는데, 반대쪽 해안가로 걸어갔던 지영이 누군가 바다에 빠졌다며 소리치며 뛰어왔다. 근처에 있던 서퍼로 보이는 서양인 청년 다섯과 베트남 할아버지 한 명이 동시에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거센 파도에 구조가 쉽지 않았다. 저 멀리 힘이 빠진 구조자들이 어렵게 건져 올린 사고자의 몸을 서핑 보드 하나에 걸친 채 힘겹게 매달려 있었고, 골든 타임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간신히 해안으로 올라온 사고자에게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멀리서 익사자의 어린 아들과 아내로 보이는 이들이 울부짖음에 나는 구경하던 한국인 관광객 몇 명을 콕 집어 이 한국인 가족 옆에서 돌봐달라 부탁했다. 주변에 몰린 베트남 사람들에게 구급차를 불렀는지 확인하고, 바닷가에서 물건을 팔던 아주머니가 빌려준 전화기로 영사대행과 연신 전화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급차가 모래 위에 나타났고 들것이 멀어져 갔다. 휴대폰을 빌려줬던 아주머니가 바닷가에 나타난 경찰로부터 들은 사고자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었다. 근처 식당에서 따듯한 차를 얻어 덜덜 떨고 있던 구조자 청년들에게 전했다.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청년들은 곧 자리를 떠났다.
그날 우린 그렇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함께 봤다. 모르는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사람들과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아도 나서서 도우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편으로는 현장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어대고 도와달라는 요청마저 거절하고 떠나버린 한국 사람들과 전혀 도움을 줄 생각이 없는 한국 공관의 행태도 마주했다. 숙소에 돌아와 아이들을 재운 고요 속에서 지영과 나는 잘 못 마시는 맥주를 꺼내 나눠 마셨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본, 기운 빠졌던 그날. 먹먹함을 나누고, 함께 분노할 수 있는 지영이 있어서 그나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지영이 더 좋아졌다. 그리고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지영을 알게 된 것 같아 더 기뻤다. 우린 호이안에서 꿈같던 시간들을 자주 추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1년 여름, 지영은 삼중음성 유방암에 걸렸다. 쉽지 않은 케이스라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지영은 항암과 수술 등의 표준치료를 모두 받아냈고, 엄청난 의지로 삶을 바꾸었다. 지영은 무작정 현대 의학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능동적이고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했다. 먹는 것, 마시는 것부터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 그리고 숨 쉬는 것까지…… 지영은 ‘나라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노력을 했다. 매일 명상을 하고, 치료를 위한 필라테스도 꾸준히 했다. 몇 시간씩 산에 올라 좋은 공기를 맡고, 햇볕을 쐬고, 맨발로 흙을 밟았다. 이런 지영의 노력을 잘 알지 못하는 의사는 볕에 그을린 지영의 피부를 보며 약이 잘 맞아서 피부가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 의사 앞에서 지영은 그저 웃었다.
육아로 인해 일을 쉬거나 줄여야만 했던 지영은 이번엔 자신의 몸을 돌보기 위해 다시 일을 멈추어야 했다. 나 역시 코로나 시기의 험난한 봉쇄를 겪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를 챙기고, 나빠진 내 건강을 관리해야 하기 위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있던 차였다. 내 베트남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많은 지인들이 ‘이제라도 다시 뭔가를 해보라’고, ‘이곳에서 뭐든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실제로 아이도 엄마 손을 덜 필요로 하게 되었고, 베트남에 대한 내공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를 내보일 직함과 조직의 타이틀이 굳이 필요한 걸까?’ ‘그냥 지금처럼 소소하게 내가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괜찮은 이웃으로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영은 그런 나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어쩌다 전환기를 맞은 지금의 그녀를 보며, ‘자신의 몸과 마음에 귀 기울이고 가족과 가까운 주변의 삶을 돌보는 것이 저 멀리 세상을 구하는 일만큼 중요하고 귀한 일’이라는 걸 점점 자신하게 되었다. 우린 멈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1년 뒤, 지영은 의사로부터 ‘좋아지고 있다’라는 감사한 소식을 들었다. 1년 동안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낸 지영이 이번엔 다시 베트남과 주변 국가들을 여행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이번엔 지영의 제안을 내가 덥석 물었다. 강인해 보였으나 실은 얼마나 무서웠고, 태연한 듯 보였지만 실은 얼마나 아파왔고, 당연한 듯 보였지만 실은 얼마나 힘들게 애써왔는지 에둘러 짐작 밖에 할 수 없는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도록 돕고 싶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추진력 좋은 지영이 신나게 비행기표를 끊어버렸다. 여행하기 무려 6개월 전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그녀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용기를 낸 그녀가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베트남에 왔다. 이번엔 우리 집이 있는 하노이였다. 몇 년 전 호이안에 올 때와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이제 제법 자리를 잡은 그녀의 짧은 머리, 그리고 캐리어 하나 가득 담긴 각종 약과 영양식들이었다. 그간 무수히 많은 손님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지만 이번엔 내 마음가짐도 달랐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 정말 제대로 대접하고 싶어!’ 나는 그녀가 애정하는 이 땅에서 무엇이든 기쁨과 행복을 가득 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계속해서 싸워나갈 에너지가 될 수 있도록, 이번 여행이 너무 좋아서 다음 여행을 당장 기획하며 계속해서 즐거운 미래들을 상상할 수 있도록 그녀가 정말 ‘잘’ 지내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곧이어 지영의 남편 종진까지 베트남으로 들어왔다. 지영의 가족은 무려 한 달이 넘도록 베트남과 라오스 곳곳을 찐하게 여행했고, 베트남의 대부분 여정에선 우리 가족이 함께 했다. 두 나라의 시스템이나 환경이 한국에 비해 부족했지만 지영은 어떤 환경에서든 늘 만족하고 즐겼다. ‘내가 만나지 못했던, 십 수년 전 베트남의 젊은 활동가 지영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나는 상상을 했다. 한국처럼 산에 가고 필라테스를 못하는 대신, 지영은 매일 요가를 하고 낯선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의 불안과 걱정을 잊은 듯 지영은 많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힘없는 자들 편에 서서 불의에 대항하며 소리치던 큰 지영도 좋지만, 이번 여행을 함께 하며 본 작은 지영의 모습도 참 좋았다. 소 똥 뿌려진 흙 길을 맨발로 걷고 비에 젖은 꽃 내음을 맡으며 삶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맞이하려 하던 지영, 별것 없는 시장 구경에 베트남 사람들과의 대화에 그저 호호호 즐거워하던 지영, 비행기를 자주 타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부러 기차 이동을 선택하던 지영, 군것질 좋아하던 남편 종진의 건강을 걱정하며 애정 어린 타박을 수시로 해대던 지영, 무언가에 짜증이나 심술을 부리던 딸아이를 품에 꼭 앉고 길가에 털썩 앉아 아이가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주던 지영, 그 자체로 강인하고 따듯하고 진실된 모습의 인간 지영. 나는 이번 여행에서 작은 인간 지영의 모습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내 챙김이 부족해서였을까? 한 달이 넘는 여행을 다녀온 후 지영의 암은 다른 장기로 전이, 재발되었다. 지영은 순식간에 말기 암 환자가 되었다. 첫 선고를 받을 때보다 지영 본인도 주변 가족들도 상심이 더 컸다. 그렇게 얼마간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난 지영은 이전처럼 다시 일어나 자신의 삶을 세우기로 다짐했다. 독성항암치료 밖에 없다는 주치의를 설득해 새로운 치료방식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몸에 들어온 암세포를 ‘금솔이’라 칭했다. ‘그냥 금솔이를 살살 달래서 오래오래 데리고 지낼까 봐.’ 지영이 웃으며 말했다. ‘어서 빨리 낳아서 보답하겠다’는 큰 부담감을 가져왔던 탓일까? 대충이 없는 그녀가 암환자로서도 너무 최선을 다해서였을까? 나는 그녀가 일과에서도 주변의 관계에서도 조금은 살랑살랑 걸어가기를 바랐다. 검진을 위해 병원을 가는 일정이 늘어났지만, 지영은 점차 다시 ‘지영’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운동을 하고, 건강한 음식을 해 먹고, 산에 가고, 학교도 가고, 가끔 지인도 만나는 일상을 보냈다.
미국에서 오는 약을 기다리며 1회에 500만 원이 넘는 지영의 비급여 치료비 소식을 들은 갤러리에서 종진의 사진을 판매하는 전시를 먼저 제안했다. 사진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30년 넘게 사진을 찍어 온 종진은 국가폭력 고문 피해자, 성매매 여성쉼터, 유방암 환자, 정신장애자, 농아 학생, 발달장애자들과 오랫동안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해온 ‘사진 치유자’이다. 단순히 멋진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는 마음과 대상에게 다가가는 자세를 늘 고민하던 그였다. 그가 오랜 세월 캄보디아, 티베트, 필리핀, 북한 등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치료비에 보태자는 계획이었다.
처음에 지영은 ‘내 몸뚱어리 하나 지키자고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게 너무 민망하고,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하며 전시를 반대했다. 종진도 ‘개인적인 일로 전시를 열어 사진을 파는 것이 과하지 않을까’하며 주저했지만, 이번엔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들은 더 과해도 된다고! 모두가 보낸 응원과 격려에 안 그래도 눈물 많은 둘의 수도꼭지가 다시 열렸다. 종진은 민망함을 거두고 용기를 내어 본격적인 전시 준비를 했다. 지영은 ‘누군가에게 덕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둘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그늘진 곳에 있던 이들을 위해 늘 밖으로만 향하던 종진의 시선이 이번엔 사랑하는 아내 지영에게 모였다. 종진은 전시를 여는 글을 썼다.
세상을 향하던 저의 사진적 시선들이 이번만큼은 제 아내 지영의 치료와 회복을 위한 쓰임의 수단이 되길 고개 숙여 소망합니다. 아울러 아내 지영과 저의 치유 동행의 여정을 항상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 두 사람은 슬픔과 고통, 불온한 상상과 마주하는 법을 단단하게 익히면서 오늘 하루의 의미를 소중하게 품어가겠습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한 기도 또한 멈추지 않겠습니다. 오늘도 그저 참 고맙습니다.
둘보다 더 기쁜 건 둘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생긴 주변 사람들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베트남에서 전시 포스터를 만들어 힘을 보탰다. ‘지구상에서 가장 멋지고 강인한 여성, ‘지영’을 위해……’ 지영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수식어를 포스터에 넣었다. 둘의 지인인 김혜민 PD가 전시 오프닝의 사회를 보며 ‘임종진 작가의 사진 인생을 부인 윤지영에게 헌정하는 자리이자, 각자의 신께 지영을 살려내라 단체 시위하는 자리’라고 전시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했다. 진짜 그랬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각지에서 달려왔다. 시위에 직접 가지 못하는 해외 곳곳에서도 마음을 전했다. 전시장 한편에 ‘518 민주항쟁 기동타격대’의 화환이 세워졌다. 누군가는 자처해서 전시 세팅을 도왔고, 누군가는 문지기를 맡았고, 누군가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부러 빵을 만들어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노래패 둥근 소리의 이진영, 이민희 님의 노래, 명창 현미님의 소리, 노래패 꽃다지 출신 조성일 님의 군계일학 공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교수님, 자살방지시스템을 만드는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님, 사회적기업 연구원 마리, 소뿔 치유 공동체 경희님이 갑작스럽게 나와 종진과 지영과 전시에 대한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외에도 세상 따듯하고 멋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이런 이들에게 둘러 쌓인, 이렇게 슬프고 이렇게 행복한 축제라니!’ 틈틈이 업데이트되는 행사 사진과 후기들을 보며 지영과 종진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과 종진을 응원하러 만들어진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연대의 에너지를 느끼고 돌아갔다. 집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 말고도 해줄 게 없어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고 위로와 위안을 주고받았다. 나는 모두를 위해 언제든 다시고 이런 판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허전하고 심란한 누구든 와서 마음이 꽉 채워가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세상 어디든 아픈 사람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언제고 누구나 다 아프게 된다. 그러나 지영과 종진의 아픔과 고통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더욱 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그동안 그 둘이 다른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려 무던히도 애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간 뿌렸던 씨가 이들에게 돌아오는 거라 여기지만, 내가 아는 한 그 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고 말 사람들이 아니다. ‘이번에 받은 사랑과 응원을 모아 언젠가 수 십 배, 아니 수 백배로 세상에 갚으리!’ 하며 단단히 벼루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영과 종진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꼭 필요한 이유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지영이 담담하게 내뱉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인생 뭐 있나. 사랑하고 사는 것 외에.'
사진전에서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환하게 웃으며 포옹하고 있는 지영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녀가 보고 싶다.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동시에 섬세하고 사려 깊던 여행자로서의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들숨 날숨 하나씩 느끼며 베트남 구석 울퉁불퉁한 길 어딘가를 또 말없이 오랫동안 함께 걷고 싶다. 아니면 이번엔 제주에서, 캄보디아에서, 네팔의 설산에서, 모로코의 어느 해협에서…… 그게 어디든 이번엔 내가 그녀를 더 꽉 안아 줄 거다. 지영이 나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 전시는 끝났지만 임종진 작가의 사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온라인로 구매 가능합니다!
https://blog.naver.com/galleryindex/22309816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