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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했던 책 뭉탱이

재활용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주운 책

by 아이언맨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만 있을 뿐, 그때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던 책. 그저 어려운 시를 읽었다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는 책. 도서관에서 책 사냥을 할 때, 가끔 부딪히는 책이기도 했고, 그때마다 다시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선뜩 손이 가지 않는 책이기도 했다.


그 책을 손에 넣었다. 근 40권에 달하는 세계문학전집의 첫 권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였다.


그날 월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재활용 쓰레기를 처리하러 나갔다가 횡재를 했다. 종이류를 쌓아 둔 곳에 9권을 한 묶음으로 하여 총 네 묶음의 책을 발견했다. 버리려고 내놓은 것이라 가져가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 만전을 기하기 위해 경비 아저씨를 보며 슬쩍 말했다. "이 책은 제가 가져갑니다."


읽을 욕심으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책을 소장할 목적으로 가져온 것인지, 나 스스로도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당근마켓에 내놓아도 오만 원 정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집사람의 잔소리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예전에도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전집을 들고 온 적이 있었고, 10권짜리 조선 왕비 열전을 들고 온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집사람은 필요 없는 것을 들고 와서 집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궁시렁거렸고, 그럼에도 책 욕심이 있는 난 책을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거의 30여 권이 되는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정말 쓸모가 없었다. 인터넷 시대에 더는 필요 없는 구닥다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 기억엔 결국 집사람이 당근마켓에 5~6만 원에 팔았던 것 같다.


들고온 책을 서재로 들여놓았으나, 책꽂이에는 공간이 없었다. 책상 밑 공간에 두기로 했다. 노끈을 풀고 무슨 작품들이 있나 살펴보았다. 거의 절반 이상은 읽었던 작품이었다. 그래도 뭔가 배가 불렀다. 딸아이를 불러 보여주면서 주웠다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읽으려고 집어든 책은 첫째 권이었다. 일리아드였다.


지금 읽고 있는중이다. 그런데 보니 그렇게 어려운 작품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때 나는 이 책을 어려워했을까 의아했다. 물론 수많은 그리스 용사들과 트로이 용사들의 이름, 그리고 그리스 신들의 이름들은 그 당신 어린 나에게는 아주 생소했을 것이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배경도 모른 채 무참한 전쟁 이야기를 읽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법도 했다.


사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싸웠던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배경을 추적하여 들어가 보면 신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이 되어 싸웠고,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아폴론은 트로이를 위해 싸웠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이 어쩌면 내키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책,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며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어느 가을날 아침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은 듯, 책 뭉탱이가 집안으로 굴러들어 왔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날을 즐길 생각도 잊고 책 속에 빠져 있다.


그나저나 이번 주 안으로 산행을 갔다 와야 할 텐데. 책도 좋지만 유독 짧게만 느껴지는 이 가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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