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작별하다
11월 들어 토요일마다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가을 산행은 번번이 찬바람을 맞았다. 단풍이 좋다는 멋진 곳은 차치하고라도 가까운 산으로라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는데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한해 한해 지날수록 남아 있는 가을도 하나하나 줄어들고, 산행을 감당할 수 있는 허벅지의 근육도 조금씩 줄어들고. 너무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해얄텐데 하는 생각이 부쩍 늘었다.
11월 마지막 토요일이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집사람이 친구들과 며칠간 일본여행을 간 틈에 몸을 움직였다. 가을을 작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을의 아름다운 뒷모습이라도, 비록 그것이 한순간이라 하더라도 잡아채는 것이라 여기고 밖으로 나섰다. 행선지는 금정산이다. 동문에 차를 주차하고서는 고당봉을 향해 성벽을 따라 걷자. 능선을 올라타면 저 멀리 하늘에 풍덩 빠진 듯이 보이는 제4망루를 지나고 의상봉과 원효봉을 넘어 북문으로 가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고당봉에 올라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는 지리산 천왕봉도 바라 볼 참이었다.
차를 타고 주차장을 나서자마자 마음이 요동을 친다. 밀양 금시당의 노란 은행나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금정산이냐, 금시당이냐, 이리저리 저울질 하다 금시당으로 향한다.
조선 명종 때 문신 김광진은 낙향 후 밀양강 절벽 위에 별장을 짓고 마당에 은행나무를 한그루 심어 놓고는 '금시당'이라 이름하였다. '금시'란 '지금이 옳다'라는 뜻인데, 아마도 조정에서 정치적 알력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고향에 돌아와 산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책을 읽고 제자들을 기르는 것이 참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금시'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금시당' 방문은 나에게는 '금비'였다. 500여 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좋은 곳이었던 이곳. 하지만 지금 모든 은행잎은 떨어지고, 가진 것 없이 헐벗은 모습으로 파란 하늘만 이고 있었다. 모든 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짓밟히고 짓밟혀 그 빛이 바래져 있었다. 오직 담장 위 기왓장의 오목한 부분에 떨어져 쌓인 짙은 노란 은행잎들이 가을의 절정은 아름다웠었다고, 그러나 이미 그 절정은 지나갔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쉬움을 품은 채 금시당을 돌아서 나오기가 안타까워 금시당 너머로 이어진 숲길을 걷기로 했다. 금시당을 품고 있는 산성산의 기슭을 따라 밀양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길은 밀양의 아리랑길이었다. 금시당에서 영남루까지 밀양강과 동행하는 길이었다.
길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징검다리로 강을 건넜다. 산성산 기슭을 걷는 동안 난 가을 단풍 진 산의 풍경 속에서 걸었다. 이제 난 강을 건너 풍경을 바라보며 걸었다. 비스듬히 비치는 가을 햇살은 봄날처럼 따스하였고, 강가에 억새풀은 역광 속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심연처럼 고요한 강물이 심록의 베일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을날의 햇살은 변덕도 심해 해가 기울 무렵에는 차가운 빛이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 흩어진다. 길을 벗어나 가까운 월연정에 들렀을 때 봄날 같았던 가을날을 겨울을 예고하는 서슬 퍼런 칼날의 차가운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월연정 곁의 목조 가옥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사람이 살 지 않는 듯 했으나, 한 가옥의 댓돌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었으며, 그 가옥들의 아궁이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다. 잔솔과 장작들이 타는 냄새, 그리고 아궁이 밖으로 흩어지는 연기. 겨울을 앞둔 옛 저녁의 풍경이었다.
그래, 이제 올해 가을은 끝이다. 가을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저 멀리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한걸음 늦는 난 이번에도 한걸음 늦었다. 그래도 가을과 작별의 인사는 하였단 생각에 후회는 없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철칙이 정신에는 새겨져 있다. 하지만 태생적 게으름과 미룸의 덕이 언제나 장애물이다.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아직은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 연세 많으신, 치매에 자식의 얼굴마저 잊은 어머니. 젊어서 남편을 잃고 억척스럽게 세 남매를 기르셨던 어머니. 돌아보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성정을 닮아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데 서툴렀던 나는 그저 그리 알고 계시리만 생각만 하고 말하지 못했던 말.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말하려 하여도 말할 수 없는 때에 오리니. 평생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