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주 뱅고(bangor) 버스와 1년.
미국 동부 작은 도시, 뱅고(Bangor)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내게, 버스는 다양한 감정이 공존했던 곳이다. 뱅고는 메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밤 9시가 넘으면, 도시 전체가 눈을 꼭 감은 듯 어두웠다. 젊은이 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가까운 포틀랜드나, 보스턴, 뉴욕으로 떠나기를 바랐다. 그래서일까? 도시는 점점 활기를 잃었고, 버스도 오후 5시까지만 운영이 되었다. 더군다나 주말에는 버스를 운영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첫 학기를 기숙사에서 보낸 나는 주말 내내, 기숙사에 머물곤 했다. 택시는 너무나 비싼 이동 수단이었고, 어여쁜 여자가 아닌 내게, 바람이나 쐬러 나갈래 하며 제안하는 친구도 많진 않았다. 답답해서였을까? 나는 일 년 뒤 기숙사를 나왔다. 새로운 터는 학교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그렇게 1년, 나는 줄곧 버스로 통학을 했다. 버스로 통학하던 동안 몇 가지 기억이 있다.
우선 여름이 되면 버스 안은 악취로 뒤덮이곤 했다. 숨을 최대한 참아보기도 하고 창문을 열어 보기도 했던 나. 승객이 많은 아침에는 다비도프 향수를 팔목에 듬뿍 뿌리고는 향을 킁킁 맡곤 했는데, 그래서일까? 선물로 받은 존바바토스로 향수를 바뀐 뒤에도 여전히 버스정류장을 지나갈 때면 그때의 향이 떠오르곤 한다. 아침부터 버스에는 하염없이 손잡이만 잡고 서있는 학생들이 있었고, 개똥이 묻은 신발로 터벅터벅 걸어와 잔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특히나, 동공이 풀린 두 부모 옆에서 손을 꼭 잡고 해맑게 웃는 다섯 살 소년을 보면, 그의 내일이 걱정되기도 했다.
다른 기억은 내 건망증에서 시작됐다. 핸드폰을 자주 집에 놓고 온 나는, 시간을 깜박해 마지막 버스를 놓치곤 했다. 월마트에서 장을 보고 양손 가득 들고 나와, 버스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요한 뱅고((Bangor)의 도로를 걸었다. 짓다 만 건물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길을 걷다 보면, 간간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차를 세워 목적지를 묻는 이도 있었다. 두 손에 봉지를 가득 들은 날에는 한없이 땅바닥만 보았지만,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매번 같은 버스를 타면, 운전수의 주기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가는 노선에는 3명의 운전수가 있었다. 두 명의 운전수와는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밥 아저씨에 대한 추억은 조금 있다. 밥 아저씨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1시에서부터 5시까지 운행을 했다. 내가 살던 오링 턴(Orington)은 그리 인기가 많은 노선이 아니었고, 내가 유일한 승객일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대로 된 버스정류장도 없고, 방송도 없던 그 노선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내 목적지를 휙 지나가버리도 했는데. 이런 내 긴장감이 그에게도 보였던지, 한 달이 지나서부터는 내 목적지가 되면 “빵빵” 하며 알려주곤 했다. 그와 작년 여름휴가는 어땠나요? 이번에 아들이 풋볼팀에 들어갔다면서요 와 같은 나긋하고 상냥한 대화는 하지 못했다. 난 그저, 뱅고를 떠나기 마지막 버스에서 그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물어봤을 뿐이었다.
말했듯 뱅고(Bangor)에는 버스 전용선도 없었고, 운행 시간도 짧았다. 한국만큼 버스가 깨끗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버튼도 없어 목적지가 다가오면 노오란 줄을 당기기도 했다. 하나 버스는 휠체어를 안길 수 있었고, 운전수는 늘 그들을 도왔다. 그리고 버스 앞칸의 승객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이동했다. 눈이 풀린 사람도, 개똥을 밟아 투벅투벅 걸어오던 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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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샌프란시스코 버스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