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도들
지난 회에는 ‘와우가 불러온 mmorpg의 패러다임 변화에 저항하여 커뮤니티 중심의 재미를 추구하는 mmorpg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대표적으로 길드워2가 있죠. 한편으로는, 와우가 제시한 패러다임 즉 ‘개인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mmorpg’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믿으며 이 방향을 더 강화 & 발전하려는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와우 그 자체가 그 선두에 서있긴 했지만, 다른 게임들에서도 이런 경향들이 엿보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블레이드 앤 소울을 들 수 있습니다. 블레이드 앤소울을 플레이해보면, 이 게임이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확연히 눈에 들어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 첫번째가 전투, 두번째가 스토리입니다. 블소의 전투 시스템은, 사실 독보적인 완성도를 지닌 놀라운 물건인건 맞습니다만, 오늘 제가 할 얘기와는 큰 관련이 없는 편이네요. 아쉽게도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좀더 얘기해 보기로하고 이번에는 스토리에 집중해보도록 하죠.
블소의 스토리텔링은 놀랍습니다. mmorpg임에도 불구하고 npc와 대화 할 때는 풀스크린을 써서 화면 모두를 스토리텔링에 할애합니다. 와우의 퀘스트가 화면 가장자리에 작게 뜨는 창, 그리고 그 중에서도 몇 줄의 텍스트만을 할애해서 스토리를 전달하는것에 비하면 놀라운 투자라 할 수 있죠. 게다가 블소에서는 상당량의 npc 대사들이 더빙이 되어 있습니다. 텍스트로만 제공되는 스토리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읽는다’라는 일종의 능동적 활동을 요구합니다. 많진 않지만 어느정도의 에너지,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어내려가고 그걸 이해하려데 드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죠. 오디오는 그렇지 않습니다. 플레이어가 수동적인 상태로 머무르더라도 뭔가를 전달할 수가 있습니다. 스토리가 무시되기 쉬운, 실제로 많은 경우 무시되곤 하는 현실에서 이를 보다 공격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죠.
한편 mmorpg는 사실 스토리텔링에 매우 적합한 형태의 게임은 아닙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존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뭔가 극적인 장면에서 그 장면과는 아무 관계없는 인물(주로 다른플레이어)가 등장해서 산통깨기 딱 좋은 장르이죠. 달빛 밝은밤에 창가에 줄리엣이 서있습니다. 플레이어는 아래층 풀 숲에서 그녀를 훔쳐보다가 구애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멋들어진 몇마디 말을 그녀에게 건내려는 찰나 … 지나가는 다른 플레이어가 끼어듭니다. 나의 구애를 ‘유치해’라며 비웃거나, ‘잘봐, 내가 구애란 뭔지 보여주지’라며 자기가 나서거나, ‘이여얼~ 그림 좋은데?’라며 껄렁한 말투로 분위기를 꺤다거나 … 여러모로 스토리를 전달하기엔 피곤한 게임이 mmorpg이죠.
블소는 이런 장르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인스턴스 공간을 다양한 상황에서 파편적으로 사용합니다. 와우는 인스턴스로 만든 공간을 주로 ‘던전’으로만 활용했습니다. 파티 단위 이상의 그룹으로 플레이어들이 움직일 경우 이들에게 쾌적하고 잘 조율된 전투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죠. 물론 이후에 위상변화라는 것을 도입하면서 스토리텔링에도 사용하긴 합니다만 초기에는 중요한 몇몇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쓰였습니다. 블소는 게임 내곳곳에 ‘오로지 스토리텔링만을 위한 인스턴스’들을 배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필드에 있던 NPC가 ‘따라들어와’라고 말하고 오두막으로 들어갑니다. 플레이어가 오두막으로 따라들어가면 그곳에서 뭔가 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이 오두막은 인스턴스이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들로부터 방해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한편 ‘mmorpg에서의 스토리’라고하면 많은 이들이 ‘스토리 그 자체’를 떠올립니다. 어떤 인물 또는 세력과 다른 인물 또는 세력이 어떻게 부딪혀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하는 내러티브의 전개말이죠. 그러나 실제로는, 스토리 자체만큼이나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블소는 이 지점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그러한 고민들은 게임에 충실히 반영되어 멋지고 근사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본 이야기와 크게 관계는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전편에서 말씀드린 길드워2의 출시일은 2012년 8월 28일입니다. 그리고 블소의 출시일은 2012년 6월 30일이죠. 불과 2개월정도의 차이를 두고 같은 장르에서지향점이 정 반대인 두 게임을 한 회사가 런칭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와우식 mmorpg의 패러다임이 게임계를 휩쓸면서, 와우의 방식을 계승하여 ‘개인의 경험을 더욱 강조하는 mmorpg’를 내놓을 것인지 와우와는 반대로 ‘공동의 경험을 중시하는 mmorpg’를 내놓을 것인지는 당대 mmorpg 개발사들 모두의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NCSOFT는 여기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양쪽에 하나씩’이라는전략을 내놓은 셈입니다. mmorpg 프로젝트의 규모와 난이도를 감안한다면, 그때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도 역시, 황당하지만 강력하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편, 블소말고도 이런 방향을 택한 게임이 또 있습니다. ‘스타워즈 구공화국(Star Wars The Old Republic: SWTOR)’이라는 게임입니다. 스토리텔링 게임의 명가 바이오웨어에서 스타워즈 IP를 통해 만든 mmorpg입니다. 게임은 바이오웨어의 명성에 스타워즈의 위력을 그대로 덮어씌운 듯, 초강력합니다. 스타워즈 자체가 매우 매력적인 IP인데, 여기에 바이오웨어 특유의 정교하면서 세련된, 사람을 쥐락펴락하는스토리텔링 기법이 그대로 들어가 놀라운 게임으로 완성되었죠.
이 게임에는 ‘퀘스트 창’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습니다. 창을 띄우고 거기에 적힌 몇 줄 텍스트로 스토리를 전달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모든 퀘스트의 스토리는 ‘컷씬’으로 전달됩니다. 블소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형식입니다. 헐리웃 영화로부터 도입한 카메라 워킹, 앵글, 인물들의 연기에 모든 대사 더빙까지, 그야말로 영화 같은 장면들을 게임 내에 지천으로 깔아두었습니다. 당연히 몰입도는 엄청납니다. 보통mmorpg를 하면서 퀘스트를 받는 상황은 플레이어들에게 일종의 ‘귀찮은’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 그래서 됐고 용건이 뭔데? 몹 잡아? 아이템 구해와?’ 등의 심리를 불러일으킵니다. SWTOR은 전혀 다릅니다. 몹잡고 아이템 모으는건 그저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해야하는 노동에 불과하게 됩니다. 좋은 아이템을 얻겠다는마음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마음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라는 기분이 들어 게임을 계속하게하는, mmorpg치고는 매우 독특한 상황을 만들어내죠.
SWTOR은 런칭 초기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의 여러 확장팩과 추가 컨텐츠 업데이트 내내 이런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mmorpg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에 집중하게 만드는 강한 매력을 만들어냈고, 유지해왔고, 지금까지 더욱 강화해왔습니다. 스타워즈라는 강력한 프랜차이즈에 정교한 스토리텔링의 힘이 겹쳐져서 대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로서는 이 게임이 왜 mmorpg여야 하는지는잘 알 수 없긴 합니다. 스탠드 얼론 플레이가 가능한 단품 게임으로 만드는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싶더군요. 하지만 어쨌건 이 게임은 mmorpg이고, 나름의 특색을 매우 강하게 뽐내고 있으며, 저는 이 특색을 꽤 좋아합니다.
여기까지, 리니지에서 시작해서 제가 플레이해왔던 다양한 게임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봤습니다. 좀더 최근의 mmorpg들도 해보고 있긴한데 뚜렷한 경향성이 짚힌다거나 공통의 뭔가를 이끌어내긴 쉽지 않더군요. ‘내가 사랑한 MMO들’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