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그것은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게임 ...
※ 오래전에 쓴 글이라 어색한 내용이 다소 있을 수 있습니다.
데스티니라는 게임을 수년간 플레이하고 있다. 물론 수년동안 데스티니만 하는건 아니지만, 다른 게임으로 갔다가도 엔딩을 보거나 좀 지겨워지면 다시 데스티니로 돌아오게 된다. 소위 고향. 소위 연어 게이머라는 그런 패턴이다.
이 게임은 여러 분명하고도 뚜렷한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장점 또한 많다. 그 중에서 내가 느끼기에 가장 덜 이슈가 되는게 '스케일감' 이다. 크고 거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내 기억에 데스티니만큼 충실한 게임은 쉽게 떠오르지 않음에도, 이런 관점에서 이 게임이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게만 볼 수 있다. 이런 멋진 점이 가장 덜 회자되는 이유는 당연히, 대부분의 게이머가 이를 그저 '배경'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플레이 중에 엄청난 임팩트를 준다기보다는 구체적이지 못한, 모호한 인상만을 전달하는 부분이기도하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여러 방법들은 한 번쯤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데스티니가 스케일의 감각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방법들에 대해, 실제보다 훨씬 표피적이고 아주 단순화한 얘기이겠지만 아무튼 설명해보려한다.
일반적으로 게임 제작 시 주로 신경쓰는 공간은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당연히 그래야하고 그렇게 만든다. 반대로 플레이가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공간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부분도 있다. 머리 위의 하늘이나 저 멀리, 현재 캐릭터가 발 딛고 선 부분 바깥의 공간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플레이 외적인 공간은 간소화해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카이박스라 불리우는 하늘 부분은 적당히 그려진 구름이나 별들의 그림으로 메우고, 지상이긴 하되 플레이하면서 갈 일이 없는 곳은 한 장 그림을 붙이거나, 블러처리를 통해 먼 곳에 있는 듯한 인상은 주되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게 하거나, 아예 절벽이나 담벼락 등 막힌 구조물을 세워두는 경우도 있다.
데스티니는 원경 묘사에 다른 게임들보다 더 공을 들이는 편이다. 물론 플레이 공간만큼의 밀도를 보여주진 않지만, 현장감을 주기에 손색없는 수준으로 꽤 빼곡하게 플레이 공간 바깥을 채운다.
예를들어 아래 영상은 게임 내 공간 중 하나인 목성의 위성 이오에서 찍은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CVrCmhRf4o
영상에 보여지는 공간 중 길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플레이가 불가능한 영역이지만, 꽤 먼 거리까지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이상한 분화구 또는 건축물이 눈길을 끌며, 하늘 묘사도 꽤 사실적인 수준이다. 보통은 고정된 스카이 박스를 배치해두고 넘어가는 하늘도 데스티니에서는 아주 약간이지만, 그래서 알아차리긴 어렵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아래 영상은 구원의 정원이라는 곳에서 찍은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en6ybwRO7U&t=44s
줌 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 있으면, 스카이박스가 스크롤되는걸 확인할 수 있다. 행성 (또는 위성?)의 자전 때문에 별들이 흐르는 모습을 게임 내에서도 구현해놓았다. 이건 사실 위의 영상에서와같이 고배율 스코프로 줌해서 보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조차 어려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줌했을 때 별이 흐르는 모습을 확인한다면, 조금이라도 감탄할만하다.
다시 이오로 돌아가서, 이오의 다른 위치에서 본 하늘도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영상은 이오의 높은 지점에서 찍은 하늘 풍경이다. 이오가 목성의 위성이므로, 하늘에 목성이 야트막히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목성이 천천히 자전하는 모습도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u1zUW6KQcfo
그리고 아래 영상은 완전히 동일한 지점에서 잠시 후 찍은 모습이다. 빛이 더 밝아져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목성의 위치가 아까와는 달리 하늘 위로 한층 더 떠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qZg1ZVS7c
하늘을 포함하여 플레이 공간 바깥쪽은, 일반적으로 최소 비용을 들여 감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데스티니에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는 조금 더 노력을 투자해서, 바깥 공간을 좀더 풍성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는 실외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앞서 본 영상에서 거대한 사각뿔처럼 생긴 구조물은 게임 내에서 '피라미디온'이라 불리우는 장소인데, 특정한 임무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yYkNiNTit0
이 영상에서 플레이에 활용되는 공간은 캐릭터와 몬스터가 딛고 서있는 플랫폼 몇 조각 뿐이다. 그러나 묘사되는 공간은 그보다 훨씬 넓다. 측면은 물론이고 천정에 해당하는 머리 위 공간까지 일관된 형태를 가진 구조물들이 채우고 있다. 특히 주목해봄직한건 구조물과 플레이 공간 사이의 거리이다. 거대한 허공이 메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건 거리를 표현하기 위한 공간이다. 내가 딛고 선 장소와 구조물 사이를 거대한 공간이 메우고 있다는 걸 표현하며,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동선은 전방을 향해 수평으로 이동하는게 아니라 아래를 향해 대각선으로 '내려가는' 구성을 취한다.
이동은 대각선으로 하지만 눈은 수평 전방을 향하는게 일반적이므로, 게임이 유도하는 동선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자연스레 저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던전에서 우리는 수평 전방을 향해 이동한다. 그 경우 측면이나 윗쪽을 볼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피라미디온은 플레이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자기들이 만든 것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이렇게 - 비교적 - 자세히 묘사되는 바깥 공간은 그 공간 전체에 대해 '실제하는 공간'이라는 감성을 북돋워주며, 이를 통해 플레이 공간마저도 훨씬 더 실제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레이 공간이 열려있다는 인상을 강화시켜준다. 지금 내가 서있고 돌아다니며 게임을 즐기는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닫힌 장소가 아니라 넓게 열린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데스티니에서 플레이 공간 바깥은 단순히 없으면 이상하니까 적당히 그려둔 또는 묘사가 부실해서 어지간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공간이 아니다. 거기엔 아티스트들이 자랑스레 만든 멋지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있고, 이 구조물들은 게임 세계관이 가진 설정에 따라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탄탄히 뒷받침된다. 플레이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진 않지만 게임은 종종 플레이어가 이런 요소들에 시야를 던질 이유를 제공하고, 플레이어들은 이 작은 요소들이 곳곳에 빼곡히 배치되어 있는 것에 감탄한다.
플레이 공간 바깥을 채우는 여러 요소들은, 오히려 플레이 공간의 실제감을 강화해준다. 지금 내가 서있고 돌아다니며 게임을 즐기는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닫힌 공간이 아니라, 온전하고 거대한 하나의 세계와 연결된 열린 장소라는 감각을 제공한다.
플레이 공간 바깥의 치밀한 묘사에 대해 언급했으니 이제 플레이 공간 내부로 눈을 돌려볼 차례다. 데스티니는 다른 게임에서라면 배경으로나 사용할법한 거대한 오브젝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게다가 그것들이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너무 큰 오브젝트가 너무 긴밀하게 플레이에 개입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할테니 플레이어에게 밀도높은 대응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건 개입하는건 확실하며, 그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아래 영상은 '뒤집어진 첨탑'이라는 공격전 (인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의 한 장면이다. 모든걸 갈아버리게 생긴 드릴이 등장하는데 그게 그냥 돌아가기만하는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이동해야하는 방향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rinl3tJqFs
일단 이런 사이즈의 오브젝트가 이런 규모로 움직이는 일 자체가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에서 흔한 일은 아니다. 여기에 더해 이 오브젝트는 플레이에 개입한다. 플레이어가 이동해야 하는 방향에서 돌아가고 있는데, 약간만 실수해도 플레이어는 드릴의 이동 경로 상에 들어가게되고 그 즉시 드릴에게 갈려나가 죽는다.
아래 영상은 플레이 개입 정도는 덜하지만 아무튼 멋져보이는게 나오는 공개 이벤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wD6Fq3UGIM
하늘 위에 우주선이 나타나더니 거기서 투하된 굴착기가 땅을 갈기 시작한다. 이 이벤트에서 플레이어의 목표는 굴착기를 저지하는 것이다. 적병들이 굴착기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떨어져내려 플레이어를 공격하고, 굴착기를 실어온 우주선에서는 빨간 궤도를 따라 폭탄이 떨어져내린다.
또 다른 공개 이벤트의 시작 장면을 보자. 이번에는 달에서 벌어지는 이벤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88rLUx-TDhE
처음에 지면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을 뿐 별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이벤트 시작과 동시에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 유성 중 하나는 추락한 인공위성이었음이 밝혀진다. 플레이어의 임무는 이 추락한 인공 위성을 회수하려는 적들로부터 위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플레이 규칙만 따지자면 이런 류의 디펜스 공개 이벤트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단지 여기에 개입하는 여러 오브젝트들이 분위기를 더해주는데, 더해주는 방향이 특히 커다랗다! 라는 느낌을 강화하는 쪽이다.
행성 포식자 레이드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Krt4N1vcLHA&t=1200s
좁고 어두운 골목을 한참 지나면 갑작스레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이런 식의 배치 자체가 공간의 거대함을 강조할 뿐 아니라, 그 공간에서 엄청나게 큰 피스톤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피스톤들이 부딪칠 때,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전멸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스톤이 부딪치기 전에 공간 곳곳에 마련된 안전 지대에 숨어야만 한다.
플레이어는 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 피스톤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뒤집어진 첨탑의 드릴도 그렇고 행성 포식자의 피스톤도, 그렇게까지 밀도높은 플레이를 요구하는건 아니다. 그러나 주목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확실하게 패널티를 입는다. 플레이 개입 정도가 깊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락의 처음에 말했다시피 데스티니는 다른 게임에서라면 배경으로나 쓸 법한 거대한 오브젝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렇게 움직이는데 플레이어가 그걸 무시해버리면 아쉽다. 그래서 그걸 봐야만 하는 이유를 만든다. 즉 플레이에 개입시킨다. 하지만 너무 밀도 높은 액션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그저 주목하고 주의하기만 하면 통과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어둔다. 이런 요소가 플레이에 대단한 깊이를 더해주진 않는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거대한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체감시켜준다.
데스티니가 나에게 주는 '거대하다. 크다. 웅장하다' 라는 감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꽤 헷갈렸던게 '크다'와 '넓다'라는 개념의 구분이었다.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데스티니가 주는 '거대한 느낌'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예를들어 어쌔신즈 크리드 오딧세이는 고대 그리스의 거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게임을 플레이해야하는데, 초중반을 거쳐 종반으로 가면서 이 게임이 묘사하고 있는 지역의 넓이가 대체 어느정도나 되는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엄청난 면적을 커버한다. 젤다의 전설 - 야생의 숨결은 또 어떤가? 아래 스샷에서 보여주는 지역은, 한눈에도 무척 넓어보이지만, 심지어 화면에 잡힌 모든 지역이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모두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두 게임이 제공하는 플레이 공간은 아마도 데스티니보다 넓을 것이다. 데스티니가 아무리 플레이 공간 바깥을 잘 포장하여 넓어보이게 한다해도, 실제로 넓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플레이에 견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데스티니는 '크다'라는 감각에서는 확실히 앞선다. 왜?
게임에서 넓은 것과 큰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아마도 '높이'가 아닌가 싶다. 즉 수직적 레벨 디자인. 또는, 반드시 레벨 디자인이 아니어도 아무튼 고개를 들어 저 위로 뻗어올라간 무언가를 보게 만드는 것. 반대로 고개를 숙여 저 깊은 아래 뭐가 있는지 살피게 만드는 것.
그러나 일반적으로 3D 게임에서 수직 레벨 디자인은 비교적 위험한 요소로 여겨진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디서 주워듣기로, 사람의 시각이라는게 좌우로 움직이거나 변화를 관찰하기는 수월하지만 위아래로 움직임을 따라가기는 좌우보단 어려워서 그렇다고 들었다. 일정 이상 과격한 높이 변화가 수반되는 수직 레벨 디자인을 너무 격하게 사용할 경우 불편한 경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데스티니는 개의치 않고 말도 안되는 높이의 공간을 만들고, 플레이어가 그곳을 돌아다니게 만든다. 단, 크게 두 가지의 원칙이 있다. 첫째. 가급적 이동에 국한한다. 둘째. 가급적 아래를 지향하게 한다.
이 둘을 종합할 경우, '수직으로 상당한 깊이를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낙하하는 플레이'가 된다. 실제로 데스티니에는 이런 구간이 - 다른 게임들에 비해 - 굉장히 빈번하다. 최근에 나온 이단의 구덩이 던전의 입구 부분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F_eVAuW5U0
시작시 짤막한 점프를 통해 발판 위에 선다. 곧 발판이 사라지면서 수직 낙하를 시작한다. 이후 짧은 수평 이동 구간이 몇몇 나타나지만 대부분 수직으로 떨어지는 형태로 이동한다. 좀더 진행하면 던전 첫 스테이지가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깍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성채와 같은 모습이다. 이제 플레이어는 이 절벽을 위아래로 때로 좌우로 오가면서 중간 보스들을 잡아야 한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 원칙의 의도는 자명하다. 첫번째, 가급적 이동에 국한할 것. 이런 식의 수직 레벨 디자인이 코어 메카닉 - 데스티니의 경우는 총쏘고 총을 피하는 것 - 에 지나치게 긴밀히 엮이면 수직 레벨 디자인의 부작용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과 코어 메카닉 구간이 비교적 깔끔하게 나뉘는 편이다. 두번째로 아래를 지향하기. 이 게임이 제공하는 이동 방식 상 기어올라가거나 날아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쪽이 좀더 수월한 조작이 가능하다. 따라서 올라가는 방향보다는 내려가는 방향으로 설계된 레벨들이 훨씬 많다. 물론 올라가는 경우가 없는건 아니지만 (벌레의 속삭임 던전에서 깍아지른 절벽의 아주 작은 틈을 한 마리 산양처럼 타고 올라가게 한다거나) 비중으로 따지자면 내려가는 플레이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이런 낙하 지형은 특별한 곳에만 사용하지 않는다. 이동이 필요한 어디서라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래 영상은 네소스라는 행성의 경우이다. 행성에 도착한 직후에 바로 떨어져내려서 필드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다. 이후 짧은 탈 것 이동을 거쳐 다시 거대한 공동 속으로 떨어져 내려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vdE2Ua26xJg
그리고 다음 영상은 게임 내에서 어렵기로 악명 높은 (사실 익숙해지고나면 별로 어렵지 않다) 점프맵, 벌레의 속삭임 던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NwWkNHaI0&t=52s
대부분이 아래로 떨어져내리거나 좁은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수평이동 (영상으로 봐서는 그다지 조심스러워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건 초고수의 스피드런 영상임을 감안하자. 일반인은 저렇게 빠르고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고, 상향 이동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이러한 수직 레벨 디자인 - 좀더 정확하게는, 하향식 수직 레벨 디자인을 이렇게 빈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로, 이 게임의 점프가 2단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데스티니는 클래스별로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점프를 제공하지만, 모든 점프는 공통적으로 떨어져 내린 직후 최소 1번의 제동 기회를 갖는다. 일단 낙하를 시작하고, 적절한 착지 지점을 찾아, 착지 직전에 제동을 함으로써 낙하로 인한 패널티 - 사망 또는 막대한 피해 - 를 줄일 수 있게 되어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일단 점프를 시작한 후,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착지 지점을 스스로 가늠해야한다. 착지 지점이 발 디딜 수 있는 장소인지 확인해야하고 (미끄러져내리는 곳에 착지하면 낙하 실패 패널티를 그대로 받게 된다.) 자기가 맘먹은 지점으로부터 적절한 높이에 도달했을 때 제동 동작을 해줘야 한다. 착지 지점을 찾는데 실패하면 패널티를 받는다. 제동 지점이 너무 높으면 제동 이후의 낙하만으로도 큰 데미지를 받기에 안된다. 제동 지점을 너무 낮게 잡으면 미처 제동을 하기 전에 그대로 낙하 처리되어 패널티를 받기에 안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낙하와 동시에 언제나 아래를 내려다보며 착지 지점과 타이밍을 가늠하게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다보는 시야는,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었는지를 체감하게 한다. '넓다'와는 다른 '크다'라는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작의 난이도는, 지금까지 말로 설명한 뉘앙스와는 다소 다르게, 사실 그렇게 크게 어렵지 않다. 앞서 언급했던 뒤집어진 첨탑의 드릴이나 행성 포식자 레이드의 거대 피스톤처럼, 적당히 주시하면서 최소한의 조작만으로 패널티를 피할 수 있는 정도다. 누구나 별 어려움 없이 쉽게 해낼 수 있는 수준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데스티니의 모든 점프는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어 종류를 막론하고 공중에서 최소 1번의 제동 기회를 갖는다. 이러한 점프 덕분에, 이 게임의 곳곳에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식으로 이동하는 구성이 아주 많다. 단, 뛰어내리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반드시 아래를 내려다봐야만 하는데, 그 과정이 '높이'를 체감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배치는 게임 내 곳곳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되며, 이는 게임 전반적으로 '크다'라는 감각을 플레이어에게 심어준다.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는 이 감각을 좀더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여러가지 영상을 찍고 올려서 보여주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크게 체감되지 않을 수 있다. 게임 내에서 플레이하면서 겪는 느낌은 그보다는 더 강하겠지만, 그게 '평생 게임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어!' 수준으로 강렬하거나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 플레이 핵심이 아닌, 시야에 들어오긴 하지만 포커스에서는 좀 벗어난 주변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들은 사실 개발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사치스러운 피처들이다. 플레이 공간 바깥마저도 풍성하게 채워넣는 것. 저렇게나 거대한 오브젝트들을 저렇게나 멋들어지게 움직이게 했으면서도 플레이에 깊이 연관시키지 않고 잠깐의 관찰만으로 피해갈 수 있게 만드는 것. 엄청난 높이의 수직 구조물을 만들어놓고서도 그저 떨어져내리면서 스쳐지나가면 그만이도록 만들고, 자세히 관찰한 기회나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 것.
일반적인 개발 환경에서라면 이런 선택은 개발팀 내부에서 격론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저 사치스러운 피처들을 만들 기회 비용이라면 몬스터 몇 종을 더 만들 수 있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입을 장비를 몇 점을 더 만들 수 있으며, 플레이 공간을 몇 군데 더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모든 '거대해보이게 하는 장치들'은 몬스터나 캐릭터 장비, 새로운 맵과 비교해서 현저히 임팩트가 덜하다. 몬스터도 장비도 추가 맵도 모두 플레이어 입장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요소이지만, 번지가 만든 거대한 느낌을 주는 요소들은 플레이어가 알아주면 좋겠지만 몰라도 어쩔 수 없는 곳을 채워넣고 있다. 이들을 말하자면 패시브하게 동작하는 요소들이다. 액티브하게 플레이어 전면에 나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번지가 맘만 먹었다면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 요소들에 더 신경쓰게 만들 방법도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더 불편한 경험을 제공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대단한걸 만들어놓고서도 고의적으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써먹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개발 과정에서의 가성비로 따지자면 이런 방식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번지는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덕분에 데스티니는 남들과 다른 게임이 되었다. 좁다란 모니터 너머에 앉아 마우스와 키보드 정도나 까딱거리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 거대하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풍경과 느낌을, 현실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로 느낄 수 있는 한 가장 멋지게 느끼게 해준다.
억대를 호가하는 스포츠카가 나에게 필요할까? 출퇴근 할 때나 운전하는 내게 스포츠카가 주어진다면 꽤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낮은 차고 덕분에 아무 주차장에나 들어갈 수 없을테고, 퇴근 길 지친 몸을 달래기엔 승차감이 너무 딱딱해서 엉덩이와 허리가 아파 올 것이다. 사소한 이상 증상에도 어디 고장이라도 난건 아닐까 하며 걱정하겠지. 스포츠카 본연의 목적인 스포츠 드라이빙을 즐기려면 용인이나 태백 등 어디 써킷에라도 찾아가야하는데, 애딸린 유부남이 주말에 혼자 그런데 가기는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도심에서 출퇴근 길에 스포츠카를 모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니? 간지가 나잖아. 스포츠카라는 호화사치재는 원래 간지 때문에 타는거다. 번지의 데스티니도 비슷하다. 유저들이 아무리 컨텐츠가 부족하네 어쩌네 해도 이 회사는 다음 맵을 평탄하고 소소한 것들이 적당히 메워넣고 더 많은 플레이어블 컨텐츠를 넣기보다, 웅장하고 거대한 배경과 움직이는 오브젝트, 터무니없는 스케일의 낙하 장치 등을 채워넣을 것이다. 이 게임은 원래 이런 게임이다. 쓸모가 직접적이지 않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들이 듬뿍 들어간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