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세키로와 다크소울3를 연달아했는데,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한참 전부터 알고있었겠지만 전 이제서야 발견해서 기쁜 나머지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세키로의 귀불, 다크소울3의 화톳불, 디비전1의 다크존 이송 등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짧은 세션 플레이의 결과로 얻은 가치를 내 것으로 확정하는 장치"**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짧은 플레이 세션"은 하나의 귀불에서 다음 귀불까지, 하나의 화톳불에서 다음 화톳불까지, 이전의 이송에서 다음 이송까지의 플레이를 의미합니다. 이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는 여러가지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경험치, 돈, 장비 등이 그것이죠. 다크소울3에서는 소울이라는 돈이면서 경험치인 단위를 획득합니다. 세키로에서는 돈과 경험치를 각기, 디비전1에서는 장비와 각종 아이템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가치"는, 아직 온전히 내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내 것으로 확정"해야만 비로소 기능합니다. 아울러 내 것으로 확정해야만 어떠한 경우에도 잃지 않는, 완전히 내 것이 됩니다. 그럼 확정하기 전에는? 잃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잃을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건 물론, 캐릭터가 죽을 때입니다.
캐릭터가 죽으면, 다크소울3에서는 소지하고 있던 모든 소울을 죽은 자리에 드랍합니다. 세키로에서는 그간 모았던 돈과 경험치가 모두 소멸되어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잃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확률 기반이라 유저가 적극적으로 개선할 여지는 적습니다.) 디비전1의 다크존에서 죽을 경우 다크존의 이번 플레이 세션에서 얻은 모든 장비를 그 자리에 드랍합니다. 멀티플레이 게임이기에, 다시 그 자리를 방문했을 때 그대로 내가 드랍한 아이템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잃을 가능성"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이 각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위협하는 긴장감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각 플레이 세션의 내부에서 이 긴장감은 점차 고조되어 갑니다. 직전의 화톳불에서 막 떠난 캐릭터에겐 잃을 것이 아직 많지 않습니다. 죽어도 별 타격이 없죠. 따라서 긴장감도 낮습니다. 그러나 플레이가 진행되면서 다양한 적들을 만나고 해치워갑니다. 그러면서 소울이 쌓여가죠. 잃을 것이 많아졌기에 긴장감도 높아집니다.
그러다가 화톳불을 만나면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잃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긴장감을 이완시켜주는 것, 다시말해 "잃을 가능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확정해주는 장치가 바로 귀불, 화톳불, 이송입니다. 귀불을 통해 그간 모은 경험치를 스킬로 환산하거나 화톳불을 통해 레벨업하거나 장비를 구입하거나 구한 장비를 이송하면 그간의 플레이 세션으로 얻은 가치는 완전히 내 것이 됩니다. 잃을 가능성이 사라지고 긴장감도 풀리는 것이죠.
귀불, 화톳불, 이송은 하나의 플레이 세션을 매듭짓는 지점이자, 긴장감 싸이클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지점이고, 플레이 경험의 기승전결을 이루는 단위입니다.
이 확정 장치는 사실상 고전 게임들의 세이브 포인트 시스템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당시의 세이브 포인트는 아마도 저장해야 할 요소를 최소화해야만 했던 시기 기술적인 이유로 탄생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때 게임들에서 세이브 포인트를 두는건 필수적이었죠. 그러나 이 기술적으로 필수적이던 장치는, 그 필수성 때문에, 게임 디자인적인 필연성도 갖게 되었습니다. 확정 장치를 설명하며 말씀드렸던 "하나의 플레이 세션을 매듭짓는 지점이자, 긴장감 싸이클의 시작이며 동시에 끝이고, 플레이 경험의 기승전결을 이루는 단위"로서 말이죠.
시간이 흘러 여러 좋은 기술들이 생겨나고 세이브 포인트를 유지할 기술적 이유가 사라진 시점에, 게임 디자인은 곤란을 겪게 됩니다. 기술적으로 세이브 포인트를 둬야 할 이유는 사라졌지만 게임 디자인적으로는 여전히 꽤 좋은 장치였거든요. 하지만 비디오 게임의 많은 요소들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게임 디자인은 기술에 종속적입니다. 기술적으로 용도 폐기된 무언가를 게임 디자인적인 이유로만 살려둘 수는 없었어요. 결국 이 장치는 한동안 사라졌고 게임 디자인은 세이브 포인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다크소울에서 짜잔~하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다가 부활했냐면 그건 아니고요, 제가 모르던 여러 게임들에서 다양한 변형으로 사용되어왔겠죠. '짜잔~하고 다시 나타났다'는건 그냥 제가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어쨌건, 다시 나타난 이 "현대적" 세이브 포인트는 이전에 비해 월등히 친절해진 모습이었습니다. 고대의 세이브 포인트는 저장을 못하면 그 무엇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이브 이후 보스를 잡았지만 보스를 잡은 후에 세이브를 새로 하지 못했나요? 아쉽지만 그 보스는 다시 잡으셔야 합니다. 마지막 세이브 이후 모은 경험치를 다시 찾고 싶다고요? 세이브를 하지 않았다면 그중 0.001%도 돌려줄 수 없습니다. 얻었던 돈은 물론이고 아이템도 저장해드리지 않습니다. 갔던 길 또 가기 싫어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겨워도 참으세요. 전 아직도 파판5의 마지막 보스 직전에 한동안 세이브 포인트가 없어서 겪어야만 했던 고난들을 기억합니다.
현대적 세이브 포인트는 그 많은 불합리한 불편함들을 제거했습니다. 일단 보스를 잡았다면 세이브 포인트 도달 여부와 무관하게 그 상태는 보존됩니다. 숏컷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디비전은 여기서는 좀 예외지만) 갔던 길을 또 가고 또 가야만하는 불편함도 해소해줍니다. 제한적이긴 하나 돈 또는 경험치를 아이템화하여 (다크소울3) 죽더라도 보존할 수 있는 방법도 제공합니다. 귀불과 화톳불과 이송은, 고전 게임의 세이브 포인트가 가지고 있던 지나친 패널티를 제거하고, 긴장감만 남겨주는 방식으로 현대화 된 존재입니다.
한편 이 현대화된 세이브 포인트는 난이도 조절에도 용이함을 제공합니다. 세이브 포인트 자체가 완전한 회복 기능을 제공하면서 반대로 게임 내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완전히 회복할 수단은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플레이를 진행하며 캐릭터는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누적되면 점차 위험해지죠.
결국 세이브 포인트간의 간격과 난이도는 비례합니다. 간격이 길고 멀수록 난이도는 높아지는거죠. 물론 게임의 난이도를 조절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할 겁니다만, 세이브 포인트 사이의 거리 또한 이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PC와 NPC의 숫자나 패턴 등등을 조절하지 않아도요.
단, 디비전1의 다크존은 이러한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예외가 됩니다. 하지만 만약 이 비슷한 기능을 가졌더라면 로그 플레이의 역할과 비중을 좀더 다양하고 능동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오래전에 퍼머데스에 대해 얘기 https://brunch.co.kr/@felkerkim/8 하며 디비전1의 다크존을 언급하기도 했었는데요, 그때 사실 다크존에 대해 얘기하면서 뭔지 모를 위화감이 있었거든요. 세키로와 다크소울3를 겪어보니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제가 퍼머데스와 세이브 포인트 시스템을 구분하지 못한 거였어요.
퍼머데스에는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임에서 아무리 진도를 나가도 그간 모았던 것을 상실할 위험은 언젠나 존재해요. 죽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키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만에 하나, 죽어버린다면, 어쨌건 그냥 죽는 겁니다. 남는 것 없이 말이죠. 이 지점은 현대화된 세이브 포인트 시스템과 확실히 다릅니다.
대신 현대의 퍼머데스 게임들은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제가 퍼머데스 글에서 예로 들었던 다키스트 던전이나 XCOM의 공통점은, '여러 유닛이 등장'한다는 점이죠. 그중 일부 유닛을 잃더라도, 남은 유닛은 여전히 건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모든걸 잃는 상황은 어느정도 막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위에, 디아블로3의 하드코어 모드가 존재합니다. 확정 장치도, 위험 분산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퍼머데스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