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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Dec 28. 2020

포르투의 토마토잼은 얼마나 맛있을까?

이토록 시시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라니

여행에도 장르가 있다면,
포르투는 평범한 동화일거야.



밤이 긴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토마토 잼이다. 단 도톰하고 옴폭 패인 그릇에 듬뿍 담겨있어야 하고, 곁으로는 큼직한 쿠키가 흐트러져있어야 한다. 주둥이가 기다란 주전자로 따끈한 우유를 따라내면, 달콤한 잠에 빠질 수 있다.



포르투의 밤, 달콤한 꿈

잠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 바스락 거리는 이불을 반 쯤 덮은 채로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고 읽는 듯 잠이 들 듯 할 때 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방문이 채 열리지 않을 정도의 예의 그 다정한 배려에 미소가 지어진다. 카페트 위를 뒹굴고 있던 실내화를 찾아 신고 토독 달려가 방문을 열면, 와! 놀란 건 나다.


"어디에서 먹을거니? 침대가 좋겠지?" 놀란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고 웃으며 쿠키와 홍차, 그리고 곁들일 우유가 놓인 쟁반을 침대 위에 올려둔다. "밤에 먹기 좋을 거야. 여분의 쿠키는 주방에 둘 테니 얼마든지 가져다 먹으렴."



밤에 먹기 좋다니. 그러니까 늦은 밤엔 먹지 말라거나 양치를 꼭 하고 자라거나 같은 말이 아니라 긴 밤에 먹기 좋을 간식이라니. 게다가 이렇게 아기자기한 모습이라니. 노릇한 쿠키를 들고 귀여운 티스푼으로 한껏 잼을 올린다. 새초롬한 붉은색 잼은 예상 밖의 진한 달콤함으로 입가에 묻어난다. 그 맛에 반해 몇 개나 먹고 나서야 침대 옆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두고 눈을 감으면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겨온다. 쿠키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던 밤, 포르투의 장르가 동화로 바뀌었다.



한 번쯤 상상했던 적이 있을까?

귀여운 접시 위로 수북하게 올려진 쿠키와 따끈한 우유를 마시며 잠이 드는 모습. 그 꿈은 틀림없이 달콤할 거라고.


집집마다 다른, 사람마다 다른

여행의 장르는 집으로 정해졌다. 낯선 방에서 깨어나던 순간, 아침이면 들려오는 소리, 식탁 위의 취향과 오늘 하루에 대한 대화, 어느 밤에는 누가 봐도 집에서 만들었을 법한 요리와 때로는 술을 곁들이며.



모든 집은 저마다의 따스함이 있었다. 한 소설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고 했던가. 그러나 여행에서 만났던 집들은 따스함 느끼게 하는 온도와 그 생김새가 모두 달랐다.

무심한 듯 편안함을 느끼게 하거나, 적당한 거리를 두어 자유로움을 갖게 하는 노력은 저마다의 애정과 배려였다.

 


때로는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이나 가족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놓여 있기도 했다. 여행자를 위해서라면 한 두 개면 충분할 위생 용품이 스무 개쯤 가득히 들어찬 서랍장에 약과 함께 놓인 도톰한 양말과 담요는 단순한 친절이라기엔 분명한 애정이었다.

조각 피자라도 사 와 먹을 때면 "저런, 저런!" 하며 커다란 접시를 꺼내주고는 곁에 앉아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담아주는 주방에선 여행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따옴표가 생기고 역할이 주어질 때, 여행의 장르도 정해졌다. 90년대 홈 드라마, 최근의 다큐멘터리, 때로는 시트콤, 또는 편집점이 제 멋대로인 브이로그가 되며 그 시절의 여행기 또는 성장기 어쩌면 서로의 옴니버스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일상의 풍경, 서로의 배경

포르투의 아침은 서로의 하품과 뒤척이는 소리로 시작했는데, 침대에 누워있다가 서로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 그제야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 달그락 거리면 상대방을 깨울 것 같아서 그즈음 일어난다고 하면 어쩐지 핑계같아 보일까.



아침으로 진한 블랙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는 신문을 펼치며 오늘의 행사에 대해 들려주고, 나는 우유를 가득히 넣은 라떼를 반쯤 비워내고 나서야 오늘의 계획을 세워본다. 물론 친구를 만나러 가는 데 같이 가자거나 저녁에 열리는 무료 공연에 가자는 그녀의 말이 곧 계획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집이 생긴다는 건 나의 역할도 생긴다는 의미일까. 이 집의 친구나 룸메이트, 혹은 손녀딸처럼 어울리는 역할을 찾아간다는 것은 꽤 흥미롭다. 시장에서 할머니가 좋아할 꽃을 고르고 지난번 먹고 싶어 했던 타르트를 사온다거나, 그리고 강아지 메디의 간식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집에 사는 이상 메디와의 관계가 생겨버린 것이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지 잊은 채로 달려드는 이 아이를 안아줄 힘을 기르고 종종 간식도 나눠줘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집은 저마다의 행복이 있었다. 방의 크기나 상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모든 집은 저마다의 불편한, 행복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살아왔던 것과 달라서,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서 불편했지만 곧 괜찮아졌다. 정말로 그래졌다. 집이 아니라 사람과 가까워 질 때, 비로소 그만의 표현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수많은 모습의 애정이 번역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세시, 웃음이 달그락 거리는 주방
슬그머니 책을 따라 읽게 되었던 런던 유학생의 방
노을이 비스듬히 질 때면 창가로 하나 둘 나왔던 파리 마레 지구
오후에 들어오는 볕이 좋아서, 꼭 그곳에 오래 앉아있던 작은 방


또한, 어떤 집에서든 나의 역할이 있었다. 그 작은 역할을 찾아낼 때 이야기는 풍성해졌다. 비록 한 줄의 일기일지라도 하루에는 전부가 되는 문장이 적힐 때, 여행은 달라졌고 그들의 일상도 달라졌다.



누구의 공간도 아닌 곳은 누구의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오래된 책, 어떤 습관이나 소품, 그리고 머무르며 들려줬던 이야기는 이곳에 남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끝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작은 배경이 되고 끝내 연결이 되는 옴니버스 영화처럼, 그래서 대사 한 줄 배경 한 컷도 사랑스러운 <러브 액츄얼리>처럼, 서로의 일상과 여행이 만나는 하루는 영화처럼 낭만적인 이야기가 되어갈까.



포르투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묻는다면 나는 토마토 잼을 떠올릴 것이고, 포르투와는 정말이지 상관없는 이런 기억들로 나는 포르투를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포르투가 제아무리 아름다워져도 특별해지지 않을 것이고, 더욱 유명해진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혹여나 여전히 볼 것 없는 동네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포르투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이런 토마토 잼 같은 이야기일 뿐이니까. 내가 인생에서 기억하는 것도 사실은 대부분, 그렇듯.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 와인과 치즈를 또 먹는다, 밤은 길고 수다는 더 길어지니까.


쿠키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던 밤, 포르투의 장르는 동화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잠에서 깨어나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이 여행이 끝나면 쿠키를 이렇게 많이 먹을 일도, 잼을 발라 먹을 일도 없을 거라는 것을.


그러나, 아마도


어느 겨울 밤, 누군가를 위해 쿠키와 잼을 내어주게 될 것이라는 걸. 여행자이거나 친구이거나 또는 새삼스럽지만 가족 중의 누군가에게. 그렇게 누군가의 장르도 달라질 것이라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몇 개쯤 먹었을까. 그 긴 밤에.


포르투에서 토마토잼을 먹어야 하는 시시한 이유가 생겨버렸다.


이따금 생각나고 도무지 잊히지 않는,

긴 이야기를 나눈 밤.

평범한 취향은 서로의 평범한, 배경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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