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지하철 출구는 이따금 나를 헷갈리게 했는데, 대개 숫자 1, 2, 3 혹은 알파벳 A, B, C로 표시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꽃이나 배와 같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도통 어디로 나가야 할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으면서도 나가고 싶은 출구가 생겨버렸다. 캄포 그란데(Campo Grande) 역에서는 그래서, 꽃으로 나갔다. 늘 그렇듯 그 방향은 아니었지만, 맞기도 했다. 그러니까 조금 더 걸으면 될 뿐이니까. 그렇게 오비두스로 가는 길은 꽃에서 시작했다.
꽃이 좋겠는걸, 그렇게 Amarela를 따라갔다.
리스본에서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하는 작은 마을 오비두스는 성채를 뜻하는 라틴어 오피둠(oppidum)에서 유래됐다. 그 이름처럼 중세 시대의 성곽에 둘러싸인 마을은 아직도 13세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오래된 마을은 '왕비의 마을'로도 불린다. 역대 왕들이 왕비에게 결혼을 기념하며 마을을 선물로 준 이래로 왕비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곳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오비두스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을까.
머무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은 무엇이 될까.
오비두스역에서 내리면 샛노란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리스본의 그 노란색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낡고 바랜듯한 색이 아니라 화사하고 따사로운 분위기랄까. 햇볕이 내리쬐면 그늘이 아니라 노란 조명이 비출 것처럼, 성벽을 따라 오르며 설레기 시작했다. 마치 걸어가는 길에 조명이 켜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장면이 등장할 것만 같아서.
매 순간, 조명은 켜지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주 환하지 않아서, 이따금 석양을 닮아서, 가끔은 잠이 든 나를 깨우지 않는 달빛이 되어서, 나는 모르고 있었던게 아닐까? 타박타박 걸었던 그 거리에도 가로등이 있었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도 눈에 시리지 않게 희미한, 스탠드가 있었어.
삶에는 언제나 한 사람을 위한, 오직 그 시간에 빛나는 조명이 있어. 그 아래로 어둡고 외롭다며 슬퍼하는 사람이 있지. 그 무대에서 가장, 빛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성곽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조금씩 펼쳐지는 마을은 골목마다 다채로운 풍경이다. 중심 거리 Rua Direita로 들어서면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건물들 사이로 작은 식당과 소품 가게가 길을 따라 이어지는데, 비슷해 보이는 색깔은 머무를 때 선명하게 달라진다.
@Katia De Juan
코르크, 도자기, 레이스, 목재와 전통 공예품은 그 소재와 특징이모두 달라서 '그릇'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같지않은 모습이다. 그릇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그를 수식하는 형용사나 부사를 훨씬 더 많이 말하게 될 것만 같다. 그러니까 손이 닿지 않은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저 '그릇'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색깔과 크기 그리고 모양에 따라 쓰임도 달라질, 그래서 그릇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 그릇이 담아낼 이야기를 상상하며 골라야 했다.
지금까지 여행이 어떤 장소를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면, 이 마을에서는 자꾸 길에서 멈춰서게 되는 거야. 그리고 알았지.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있는 지금도,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을 걷는 지금이 즐거워야 한다고. 어딘가에 도착하는 지점이란 거의 없으며, 우리는 대개 길 위에 있을 테니까. 이 길에서 여행은 시작되고 방향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생겨날 테니. 지금, 이곳에서 즐거워야 한다고.
오비두스는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작은 마을은계절마다 축제가 열린다. 여름에는 마을 전체가 시간 여행을 떠나는데, 거리의 길을 따라 깃발을 꽂고 주민들은 갑옷과 부츠 등 중세 시대의 옷을 입는 것이다. 게다가 동네 곳곳에서 공연과 게임을 열어 누구든 '옛날' 이야기에 등장할 수 있다.
@Reiseuhu
봄에는 초콜릿 축제가 열린다. '초콜릿 잔에 담긴 체리 주'가 유명한 마을답게 초콜릿이 넘쳐 흐르는 분수와 각양각색의 조각으로 전시를 하는 것은 물론 초콜릿이 들어가는 술, 커피, 차와 디저트를 풍성하게 내놓는다. 무엇보다 초콜릿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흥미로운데 해마다 축제의 테마를 정해 동물, 사랑, 기후, 음악 등 다양한 주제로 여행객에 대화를 건네온다.
성곽을 걸으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달콤한 향기에 취하는 곳은 다른 계절에는 오페라 축제가 열리고 크리스마스 마을(Vila Natal)이 되기도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마을 전체가 '서점'이라는 것이다. 오비두스는 마을 중심가에 3천 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책은 무려 50만 권이 넘게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서점들은 서점의 모습이 아닌 채로 마을과 어우러져 있다. Livraria de Santiago는 오래된 교회의 모습으로, Livraria da Adega는 와인 저장고의 모습이며, 오래된 우체국과 호텔에도 책들이 꽂혀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마을은 2015년 12월 유네스코 문학 도시로 선정이 되었으며, 전 세계의 독자, 작가, 음악가 등 모든 예술가와 함께하는 국제 문학 축제인 'FOLIO'를 개최하고 있다. 가장 큰 서점이나 가장 많은 책이 있는 곳이 아니라, 이렇게나 마을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눠가는 곳에서, 어떻게 재밌는 줄거리가 적혀가지 않을까.
그러나 오비두스에서 반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꽃이다. 골목을 걸으면 초록 덩굴과 장미, 수선화, 부겐빌레아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담벼락, 창문, 계단, 문 앞과 우체통 그리고 길가에 놓인 그 풍경은, 너무도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꽃이 피었네, 라기에는 꽃이 피어나고 줄기가 휘감아지고 꽃잎이 떨어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그 모습들이 아름다워서 색깔과 향기가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겨울이 긴 지역은 눈을 가리키는 이름이 많다고 했던가. 우리에게 눈이 하나의 이름이라면, 그 먼 곳은 하늘에서 내리고 뭉쳐지고 녹거나 사라지는, 모든 과정에 이름이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 모, 벼, 나락, 쌀, 밥의 이름이 있듯이,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이름이 아닌 그 너머 변해가는 들판과 휘어지는 모습과 구수한 냄새와 뜨끈한 추억이 되듯이.
@kovacsz1
오비두스에서는 꽃을 가리키는 이름과 그 너머 스며드는 색과 향기, 그리고 촉감으로 기억이 감긴다. 우리는 꽃으로, 꽃 아닌 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알아갈수록 놀랍고 알게될수록 감동적일 이야기는 기억으로 흐른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길을 걷는 사람이 될 것이다. 꽃의 이름을 부르고 피어나는 모습을 관찰하고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는, 그 사람. 오늘의 당신에게 어떻게 반하지 않을까. 이 햇살, 이 온도, 이 거리의 당신은 한 번뿐인 모습이라서, 그래서 반하고야 말 것이다.
길을 걷다가 눈이 마주쳤다.
오비두스를 걸으면 아주 일상의 마을로 이어진다. 어느새 주변을 보니 여행객은 한 명도 없어서 아차, 싶었지만 괜찮았다. 오비두스에도 일상은 있고, 이 여행의 끝은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질 테니까.
인생의 영광은 늘 모든 사람 주위에 충만하게 마련되어 있다. 적절한 단어로 부르면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은 온다. 그것은 마법과 같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불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동네 친구를 만났다, 앞 발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오비두스에 무엇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컵, 시계, 바구니, 그리고 오래된 길.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것들에 당신이 지루해할 때쯤, 들려줘도 될까. 어느 집의 벽에 걸려 있던 그릇장은 -그러니까 너무도 태연하게 길가의 벽에 걸려 있어서 이곳이 밖이 맞는 걸까 두리번 거리게 되었던- 오크 색으로 오래전 이 집의 누군가가 직접 짰을 법한 모습인데 몇 겹의 칠이 더해져 있고 맨 아래 칸에는 수탉의 벼슬 모양의 주방 도구가 있고 그 위로는 푸른색 정어리가 그려진 컵이 앙증맞게 칸을 채우고 있다고. 그 옆집에는 치즈 플레이트와 나이프를 파는데 콕, 찍어 먹기 적당한 크기로 칸칸이 다른 꽃으로 채워져 있었던 그날의 풍경을.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고 다 아름다운 것만 있었던, 그이야기를.
왜 이 마을을 선물로 주었는지, 왜 이 풍경을 그토록 아꼈는지, 알겠다고 착각하며 나 또한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곳에 함께 오게 된다면 눈으로 보는 것 만큼, 귀로 들어야 하는 것과 코로 맡아야 하는 것과 손 끝으로 느껴야하는 세상을 만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마치, 틀림없이 처음 만나는 서로의 존재, 이름, 언어를 알아가며 무엇보다 사랑의 표현으로 서로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아서.
"오비두스의 상자를 열면"
이 모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동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당신.
마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존재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화려한 시기가 아니라 언제든 특별한 시간이 될,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선물은 '오늘'이다.
"선물은 바로, 오늘."
어제와 하나도 같지 않고 내일과 닮지 않은 오늘의 조명이 켜지고 장면이 이어지는 길에, 당신과 내가 있다. 오늘의 리본을 풀면 어떤 것이 나올까? 아마도, 무엇이 되든 이 아름다운 마을보다 훨씬 더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기대하며 - 리스본의 역에 도착해 다시, 꽃의 입구로 일상에 들어갔다.
산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한 것이리라. 매우 일상적이고 비밀스럽지 않으며 매일 매 시간이 그렇듯 아주 평범한 것. 우리는 이렇게 단순한 것이 삶이라고 믿지를 못하여 삶을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수천년을 지나쳐왔다. <표도르 마히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오비두스의 다채롭고 유일한길을 따라 걸으면 나의 오늘에 도착한다.
이 계절, 오후의, 골목에 놓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반하는 여행이, 이곳에 있다.
Obidos
그날 저녁, 한껏 들떠 오비두스에 다녀온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에게 할머니는 따끈한 차를 몇 번이나 더 따라주었다. 아름다운 계절에 다녀왔구나, 라며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면서.
"오늘이 어떤 계절인지, 누가 네 곁에 있는지 떠올리렴. 오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감동을 놓치지 말아야 해. 네가 그런 눈을 가질 때, 나뭇가지에 엉겨붙은 눈도 꽃으로 보인단다. 겨울에 눈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렴." Portuguese Grand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