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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Knowledge
Oct 03. 2024
고졸 개발자 성장기 현실 편 #1
"Hello World"
눈으로는 강사님의 수업자료가 띄워져 있던 스크린과 내 앞의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손으로는 스크린에 담겨있던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어와 기호들을 더듬더듬 따라 타이핑하고 엔터를 치는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그러자 출력하고자 했던 문구가 모니터 위로 나왔다.
"Hello, World"
프로그래밍 강습 과정을 쉽게 생각하고 온 친구들 몇은 그 사소한 결과를 얻기 위해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에 당황한 듯 웅성거렸지만 나는 넣으라는 입력을 넣자 원하던 출력이 나온 것에 감동하고 있었다.
들이라는 노력을 들였다고 해서 원하던 결과가 나왔던 적이 내 인생에 얼마나 있었던가.
마트 까대기 담당, 배송 보조, 래프팅 가이드, 설문조사원, 축구단 경호, 헬스장 인포, 텔레마케터, 블로그 마케팅 업체 영업사원, 현금 호송원, 은행 청원경찰.
고졸 신분으로 구할 수 있던, 대체로 몸으로 때우는 일들로 생계를 해결하고 틈새 시간마다 머리로 써서 외워뒀던 가사를 퇴근 후 녹음해 올리던 행위는 기대한 어떤 결과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쇼미더머니 시즌5에 참가해 예선을 통과한 적도 있지만 랩을 했던 어떤 무대도, 심지어 다음 라운드에서 불구덩이에 떨어진 모습마저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기에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나와 주변 몇몇 뿐이다. 그 경험을 계기로 래퍼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는 것 역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알고 지내던 형이 때마침 수경재배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서 낙담할 시간도 없이 초기 멤버로 들어가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간 꿈만을 바라보며 버텼던, 몸으로 때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생활로 꿈까지 잃어버린 채 돌아가는 것 외에는 이제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같아 막막하던 참이었는데
쇠파이프들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나르고, 드릴을 들고 PVC 파이프에 식물을 심을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을 뚫고, 물이 순환할 수 있도록 펌프를 설치하고, 거기에 물과 함께 흘려보낼 양분을 말통에 제조해 들어 나르고, 사다리를 들고 옮겨 다니며 LED 조명을 설치하는 등의 일을 하는 건 고됐지만 어쨌든 고생도 무언가 비전을 가지고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식물만 애쓴 만큼 자라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논문에 적혀있는 대로 환경을 구성했지만 식물은 논문에 적혀있는 대로 자라지 않았다. 결국 수익을 내지 못한 채 6개월 정도가 지나 초기 투자금이 거의 다 떨어져 가자 제일 어리고 그나마 잃을 것이 없던 내가 가장 먼저 권고사직 처리되었다. 이후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그저 집에 틀어박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스물여덟에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아무래도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는 생각을 외면하기 위해 게임이나 하고 영화나 보며 허송세월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뭐라도 해보자고 간 집 앞 국비지원 교육센터에서, 별생각 없이 신청한 개발자 양성 코스 첫 수업 시간에, 그저 시키는 대로 타이핑을 했을 뿐인데, 의도했던 문장이 출력되다니. 심지어 그 문장이 "Hello, World" 라니.
뭐랄까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선 input만 정확히 넣으면 원하던 output이 나온다고, 이걸 통해서 세상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어 보라고 컴퓨터가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후에도 날 프로그래밍에 더욱 빠지게 만든 강렬한 순간은 많았지만 내가 프로그래밍과 사랑에 빠진 최초의 순간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