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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화자 Aug 11. 2019

가위 도둑

1. 

가위가 사라졌다. 자취를 시작할 때 엄마가 살림살이로 챙겨 준 빨간 가위와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산 새 가위 2개 모두 사라졌다. 처음엔 어디서 나오겠거니 하고 가위를 쓸 일을 만들지 않았다. 가위가 필요하다면 대충 어떻게든 해결하고 어디엔가 있겠지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더니 일주일째다. 시리얼과 먹을 두유팩을 자르지 못하고 칼로 썰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큰 일은 어제 벌어졌다. 김치를 잘라야 하는데 가위가 없는 것이다. 칼은 김치 국물이 손에 묻고, 도마를 씻어야 할뿐더러, 냄새가 배니까 사용할 수 없다. 나의 철칙인 것이다. 결국 나는 김치통에 있는 건더기 몇 개를 주워 먹어야만 했다. 가위가 없어졌다 가위가. 일주일째 가위가 보이질 않는다. 이건 분명히 가위 도둑이 집에 든 것이 분명하다. 


2.

이런 식으로 가다간 김치를 칼로 썰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 싶어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심한 건망증과 순간 기억상실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의심해야만 했다. 비참하지만 혹시 냉동실에 넣진 않았을지 냉동만두와 제주도에서 사 온 오메기떡 사이를 이 잡듯이 뒤졌다. 오메기떡이 있었다니. 아침에 왜 먹을 게 없다고 생각한 거지. 여하튼 가위는 없었다. 비참함을 억누르며 냉장실도 뒤졌다.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운 냉장실에도 없었다. 가위가 없어졌다 가위가. 두 개의 가위가 동시에 없어지다니. 연합뉴스에 제보라도 해야 되나 싶었다. 결국 그날도 두유팩을 칼로 썰었다. 


3.

여자 친구를 만났다. 큰일 났어. 가위가 없어졌어. 두 개나 있던 게 한꺼번에 사라졌어. 도둑이 든 거 같아.  마침 생활용품점을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위를 하나 살 법도 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가위들의 행방을 찾아내거나 혹은 가위 도둑을 꼭 잡아 집안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가위가 없어졌다 가위가. 가위가 어떻게 변하니. 내가 더 잘할게.


4.

비참하지만 처절하게 지속적으로 나를 의심해보았다. 자유론(자유론은 고전 중의 고전이기 때문에 꼭 읽어보길 바란다)을 집필한 유명한 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기 교육의 진정한 방법은 모든 것을 의심해 보는 일'이라고 하였고, 중국 송대의 저명한 주자(주자의 책은 읽은 적이 없으므로 패스)는 '큰 의혹은 큰 진보를 가져오고, 작은 의혹은 작은 진보를 가져오며 의문이 없으면 진보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가위를 위한 진보를 위해 나를 의심하였다. 가위가 없어진 것은 내 책임이다. 내가 가위를 이상한 곳에 두었거나 가위 도둑이 가위를 훔쳐갈 수 있게 방치해뒀기 때문이다.


5.

몇 년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맥북에 사용하고 있던 키스킨이 사라졌다. 잘 쓰던 키스킨이 사라졌던 것이다. 온 집안을 뒤졌다. 역시 그날도 냉동실과 냉장실까지 뒤졌다. 방이 몹시 작았기 때문에 책장과 옷장을 모두 지척의 거리에서 뒤질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런 좋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했다. 근 한 달 동안은 나의 기억과 사고를 의심하고 회의하며 뒤졌다. 그러다 정말 화가 나 뒤질뻔했다. 대체 키스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이것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찾아야 할 텐데. 참고로 절도죄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숨거나 자수해서 광명을 찾아보자.


6.

어찌 됐든 아직까지 가위를 찾지 못했다. 든 자린 몰라도 난 자린 안다더니. 내일이면 김치를 칼로 써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더는 김치 없이 밥을 먹는 일은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노래도 있지 않은가.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혹은 다이소나 마트에서 새 가위를 살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30대 성인 남성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가위를 샀는데 하루 만에 가위가 나타난다면 그 허탈함과 자괴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조만간 꼭 가위를 찾거나 가위 도둑을 잡고 말겠다.


가위가 없어졌다 가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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