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위로 8
얼마 전 3주간 미국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간단한 통역을 도와주는 일이었는데 뜻밖에 감사하게도 나에게 기회가 왔다. 나는 미국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터라 쾌재를 부르며 잽싸게 따라나섰다. 처음으로 그 유명한 제국에 직접 발을 딛게 된 나는 미국인 가정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일정 덕에 미국에 머무른 기간 내내 홈스테이를 하며 직접 문화를 교류하는 특별한 기회까지 얻었다.
내가 머물렀던 집은 푸들 한 마리와 함께 살고 계시는 메릴린 할머니의 집이었는데, 할머니는 페이스북에서 할머니의 친구들이 ‘좋아요’를 누른 레시피로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시고 저녁마다 푸들과 함께 아이패드로 의학드라마를 즐기는 멋진 분이었다. 아침에는 마당에서 기른 허브를 가져다주시며 냄새를 맡아보게 하시고, 고령의 나이에도 직접 멀리까지 차를 운전해 좋은 곳들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매력이 넘치는 타국의 할머니에게 딱 한 가지 서운한 것이 있다면, 할머니가 늘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첫날 밤 할머니에게 내 이름과 나이, 전공을 모두 말씀드렸는데, 내가 낯선 땅에서의 본토어 사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 이름을 ‘해나’라고 과하게 굴려서 발음한 탓인지 할머니는 길에서 이웃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를 ‘앤’이라고 소개하셨다. 장유유서의 나라에서 온 나는 생판 모르는 나를 먹이고 재워 주시는 할머니의 말끝마다 꼬리를 자르며 ‘오, 그게, 사실은 앤이 아니고 한나예요.’ 하며 할머니의 실수를 계속 고쳐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 머무르는 동안 앤으로 남는 쪽을 선택했다.
앤으로 조용히 살고 있던 나에게(물론 나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다른 이들에게는 나를 한나라고 소개했다) 시련이 닥친 것은 할머니의 아들이 운영하는 피아노 가게에 들렀을 때였다. 할머니가 피아노 가게의 직원에게 나를 그냥 앤이 아니라 ‘피아노 석사를 마친 앤’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아직도 왜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주말에 할머니가 다니는 교회에서 피아노로 특송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이미 이름을 빼앗긴 나는 거기에 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했던 찬송가 반주가 경력의 전부인 인문학 전공자 한나는 순식간에 멀리서 석사를 끝마친 피아니스트 앤이 되어 떨떠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아노를 한번 쳐 보라는 직원의 호의에 마지못해 찬송가만 뚱땅거리는 나에게 할머니는 그러지 말고 클래식 중에서 한번 쳐 보라 하셨다. 하지만 저는 제대로 칠 줄 아는 클래식이 없는걸요... 할머니의 체면을 구길세라 나는 그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초등학생 때 배웠을 것이 분명한 희미한 곡을 쳤다. 직원은 저런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는지 무척 의아했을 것이다. 이름을 빼앗길 때 가만히 있었던 죄로 이제는 클래식에 통달한 사람 행세를 해야 한다니, 이런 기가 막힌 상황에서 나는 나의 소심한 성격과 영어가 아닌 모국어에 슬퍼할 뿐이었다.
굳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구절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제 이름으로 불리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원래 이름인 ‘치히로’를 빼앗겨 모험을 떠나는 ‘센’의 이야기(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를 봐도 그렇고,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 달라는 절절한 사랑의 고백도 있다(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한 번 이름을 잃어보고 정체성까지 흔들리다 보니(?) 나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아주 심오한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눈앞에서 내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통째로 바꿔놓는 무시무시한 사건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올 때 나는 할머니와 작별을 하며 선물을 건네받았다. 마을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비누와 쿠키, 그리고 귀걸이가 담긴 봉투였다. 할머니와 헤어지고 봉투를 보니 귀퉁이에 ‘to Hannah’라고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한나인 걸 어떻게 아시게 된 걸까? 뒤늦게 찾아보니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이름인 한나의 또 다른 영어식 이름이 앤이라고 한다. 아뿔싸, 나는 이름을 빼앗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빼앗길 것 같은 때는 수줍게 웃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말을 꺼내야 한다는 걸 미국에서 확실히 배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