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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나 May 26. 2019

판타지의 미학

무채색의 위로 15

인터넷으로 TV와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 인터랙티브 필름이라는 생소한 장르가 구현된 영화 ‘블랙 미러 : 밴더스내치’를 얼마 전 선보였다. 인터랙티브 필름이란 주인공이 선 선택의 갈림길에서 시청자가 직접 컨트롤하며 스토리의 전개와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형태로 진행되는 영화를 말한다. ‘블랙 미러 : 밴더스내치’의 경우 중간 중간 선택지가 나올 때마다 10초의 시간이 주어졌으며, 작게는 주인공의 아침 식사 메뉴나 음악을 골라주기도 하고 크게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 뭐라고 말할지나 어떤 행동을 할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늘 상상만 해보던 형태의 영화라 처음에는 높은 몰입감을 즐기며 재밌게 시청했지만, 영화가 점점 결말에 이를수록 나는 무척이나 피곤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안 그래도 선택할 것 많은 세상에 사는 나의 본체를 제쳐두고 극중 주인공의 삶에까지 몰입을 하려다 보니 골치가 아팠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친구를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각 10초간의 심도 깊은 고민 끝에 공들여 누른 선택지들이었는데, 1시간 30분짜리의 영화에 4시간여를 들여 존재하는 모든 엔딩을 섭렵하고 나서야 나는 나의 그런 선택들이 부질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엔딩은 말 그대로 ‘파국’에 가까웠다.

 

 영화의 결말은 크게 다섯 갈래였고, 그 갈래 속에서 세부적인 설정은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다섯 가지 결말에 해피 엔딩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비극에 이르는 통에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나의 입장에서 자꾸만 튀어나오는 주인공의 돌발행동은 짜증나게만 느껴졌다. ‘다 너 잘 되라고 선택한 건데, 그걸 그렇게 말아먹다니...’ 높은 몰입감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었다.

 

 예전에 들었던 수업에서 이런 영화와 같은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다룬 적이 있었다. 수업 후 토론 시간에 나는 침을 튀기며 ‘사용자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직접 고뇌에 빠진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주장의 요지였다. 내 인생을 살아내기도 버거워 죽겠는데 누가 여가 시간에 즐기는 게임이나 영화에서 그런 중대한 고민을 또 하고 싶을까 했던 것이다. 당시엔 다들 내 말에 그럭저럭 수긍하는 듯했으나 굴지의 대기업인 넷플릭스에서는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고 모두의 기대 속에 이렇게 인터랙티브 필름을 공개했다. 그리고 나와는 달리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즐겼던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비슷한 까닭으로 나는 판타지 장르의 영화나 소설을 늘 싫어했다. 그냥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일어날 리도 없는 일까지 생각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에 몰입하여 나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싫었다. 나는 최대한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나의 우울과 절망은 모두 가혹한 현실로부터 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우리 인생에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였다. 현실이 아니므로, 일어나지 않을 완전히 새로운 일이므로 그것들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아마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랙티브 미디어나 판타지 장르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성서를 보다 보면 성서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른다든지, 가장 약한 이를 가장 높게 세운다든지, 어린양과 사자가 뛰어논다든지 하는.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고 여전히 높은 자들만이 우세하다. 우리는 사자는 어린양을 보는 즉시 잡아먹을 것이고 사막에는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안다. 그런 참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당장 먹고 살기 바빠서 넉살 좋게 그런 현실적이지 않은 말씀 구절들에 기대어서만 살 수 없다.

 

 하지만 판타지의 미학을 새로이 깨달은 요즘, 성서가 판타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혹하고 참혹한 현실 속에서 한 줄기 희망처럼 꿈꿔볼 수 있는 빛. 현실과 동떨어져있음을 잘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와 닿는 구절들. 내 개인적인 삶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을지라도 혹시나 하고 기대해볼 수 있는 아주 조그만 가능성. 그러니 현실이 버겁고 힘들어 죽어갈 때도 한 번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성서는 현실이 너무나 고달픈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런 말씀들을 건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니 성서의 비현실성은 현실에 대하여 다른 곳에 몰입함으로써 잠시 쉼을 가지게 해 주는 인터랙티브 필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성서라는 인터랙티브 필름에는 정해진 결말이 없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우리가 인터랙티브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 가지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뻗어나가 결국 우리의 현실로 닿게 될 것이다. 오늘은 피곤함을 느끼게 하는 인터랙티브 필름을 보는 대신 성서 한 구절을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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