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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나 Dec 17. 2018

모글리를 따라서

무채색의 위로 5

 누구나 걸어가다 보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온다. 여기서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가던 길 그대로 걸어갈 것인지, 혹은 잠깐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쉬어갈 것인지. 삶이라는 길에서도 그런 순간들은 꽤 자주 찾아오는 편이고 나는 길 위에서의 수많은 선택과 결단을 거쳐 지금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분명히 타인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들이 보낸 시선, 서 있는 나를 보고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의 말, 혹은 그들이 앞서간 발자국이 나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지금까지 분명히 그런 셀 수 없는 고민들과 선택의 순간들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지금 내 눈 앞에 닥친 갈림길의 지점이 가장 크고 압도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주로 다른 사람들이 걸어간 대로 비슷하게 큰 길을 따라 걸어가던(그러나 중간 중간 작은 골목을 꼭 끼워서 걷거나 종종걸음으로 걷는 등 아주 조그만 일탈을 일삼던) 내가 가장 커 보이는 어마어마한 갈림길에 다다른 건 몇 개월 전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음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석사과정이라는 길에 뛰어드는 것은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주변에 석사과정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었는지 모르겠다. 휴학 없이 학부 과정을 달려왔기에 2년 정도 내가 사랑하는 과목에 더 깊이 빠져들어 보는 것은 전혀 손해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석사과정을 끝낸 후의 상황은 꽤 달랐다. 석사학위라는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지니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것을 살려 박사과정에 진학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물론 많았지만, 주변의 또래들처럼 더 늦기 전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꽤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했던 터라 석사학위를 살려 취업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박사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컸다. 은퇴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내 주변의 친구들은 거의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금세 초조해졌다.

 

 얼마 전, 오랜만에 1960년대에 만들어진 디즈니의 고전 만화영화 ‘정글북’을 보았다. 갈림길에서 초조해 하다가 갑자기 오래된 만화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로 정글북의 엔딩 장면 때문이다. 나는 애니메이션이라면 모두 비슷하게 즐기는 편이기는 하지만, 정글북을 볼 때마다 타 애니메이션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는데 아마 엔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정글 세계에서 살게 된 인간 소년 모글리가 흑표범 바기라와 곰 발루와 친해지고 이런 저런 정글에서의 사건들과 모험들을 겪은 후 우연히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인간 소녀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 모글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를 따라 인간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찰나, 모글리는 발루와 바기라를 향해 뒤를 돌아본다. 여기서 인상 깊은 장면이 등장한다. 발루는 간절하게 두 손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모글리에게 “Come back, come back(돌아와, 돌아와)”라고 외치는데, 바기라는 턱을 앞으로 밀며 “Go on, go on(어서 가, 가)”하고 외친다. 정글 세계와 인간 세계에서 잠시 서서 고민하던 모글리는 결국 인간 세계로 걸음을 떼고 영화가 끝난다.

 

 주인공들의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듯한 다른 애니메이션들과는 달리 정글북은 주인공 모글리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태로 남겨두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높은 확률로 모글리가 인간 세계에서 불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동물과 함께 그들의 방식대로 정글에서 살아온 모글리가 인간 세계에 적응하기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크게 고생하다가 다시 발루와 바기라에게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모글리가 스스로 인간 세계로 향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다. 모글리는 미래를 걱정하거나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그 갈림길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글리는 발루와 바기라 둘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나에게도 수많은 발루와 바기라가 있다. 누구는 간절히 그 길로 가라 하고, 누구는 간절히 이 길로 오라 한다. 나는 알고 있다.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주는 선택은 없으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길도 없다는 것을. 선택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모글리처럼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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